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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우연이었다. 쟁쟁한 중견작가 그룹전에서 그 이름을 발견한 것은. 그 ‘쟁쟁한 중견작가’들의 작품 중 유독 눈에 띄었던 그림을 먼저 보고 그제야 작가를 확인했던 터였다. “설마 그 김창완이려고.” 그런데 정말 그 김창완(68)이었던 거다. 대한민국 밴드의 전설인 ‘산울림’을 만들고, 연기 잘하는 배우의 반열에까지 오른.
무조건 만나야겠다 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이 ‘노’다. “아니, 왜 안 만나신다는 겁니까.” 이유는 선명했다. “같이 전시하는 작가들에게 미안해서”란다. 그 ‘쟁쟁한 중견작가들’을 제치고 무슨 인터뷰냐가 거절의 사유였던 거다.
이틀여에 걸친 설득과정까지 구구절절 풀어놓을 거야 있겠나. 어쨌든 중요한 것은 결국 가수, 아니 ‘화가 김창완’을 그이의 작품이 걸린 전시장에 불러냈다는 데 있다. 눈물겨운 삼고초려쯤 되려나. 그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화가’의 첫인사에는 여전히 ‘뒤끝’이 묻어 있다. “대가들도 가만히 있는데 왜 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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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짓 모르는 척하고 당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붓을 처음 잡은 게 언제인지.” 이 말 뒤엔 ‘어쩌면 그토록 소리도 소문도 없이’가 마땅히 들어 있다. 그런데 뜻밖의 과거사가 흘러나왔다. “중학교 때 비원에서 열린 사생대회에 갔었다. 신나게 놀다가 시간에 몰렸는데 뭔가 내긴 해야겠고. 그래서 점심에 까먹은 도시락을 열고 밥풀을 모았다. 친구들 것까지 모조리. 그 밥풀을 도화지에 바르고 낙엽을 한 움큼 뿌린 뒤 냅다 밟아 제출했다.”
그게 첫 작품이란다. “장려상인지 뭔지 하여간 상도 받았다”며 특유의 환한 미소를 꺼내놓는다. 참으로 놀랄 일이 아닌가. 옛 시절 대한민국의 정규교육을 받았다면 알 거다. 사생대회가 요구하는 그 천편일률성을. ‘비원낙엽 콜라주’ 같은 작품은 절대 나올 수가 없는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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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잠자던 그이의 ‘독보적 창의력’이 다시 드러난 건 산울림이 데뷔한 1977년. 첫 레코드재킷의 그림을 그이가 그렸다. 이후 앨범이 나올 때마다 그이의 작품세계도 깊어갔는데. “산울림 정규앨범에, 20주년 30주년 기념앨범과 동요앨범까지, 그린 건 20장 정도 된다. 콘서트 포스터 그림도 한 20장 되고. 당시에는 주로 가수 얼굴을 재킷에 인쇄했는데, 그게 창피해서 그림으로 도망가자 했던 거다.”
◇“방송하다 떠오르는 이미지…오늘 가서 그거 그려야지”
서울 강남구 언주로 갤러리나우서 29일까지 여는 ‘아트토핑’ 전. 황주리·최석운·성동훈·다발킴 등, 이름만으로도 솔깃할 작가들의 새해 첫 전시에 ‘작가 김창완’의 이름은 마지막에 붙어 있다. 회화작품 5점을 낸 이번 전시는 그이의 첫 전시기도 하다. 길이 2m에 달하는 ‘시간’(2021)과 함께 100호(162×130㎝) 규모가 3점이다. ‘석양’(2021), ‘달밤’(2021), ‘코 없는 엄마: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본 엄마 얼굴’(2021). 아크릴물감으로 채색한 이들 작품과는 다른 ‘천 피스 퍼즐’(2021)은 30호(72×91㎝)의 오일파스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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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바탕에 해·달·별을 매단 우주공간을 어린아이처럼 그려넣기도 하고(‘시간’), 흰 벽에 난 창인 양 과감히 면을 구획해 지는 해를 수평선에 적셔내는(‘석양’) 등, 그이의 작품에는 긴 설명이 필요없다. 다만 알록달록한 색이 돋보이는 ‘천 피스 퍼즐’에는 의미를 달았다. “수도 없는 조각이 우리 인생을 만드는데, 어느 자리에 어떤 조각이 들어가는 게 정해져 있던가. 아무 색이나 칠해도 결국 하나의 작품이 된다는 그런 뜻이다.”
추상과 반추상에 걸친 장르야 형식적 구분일 뿐, 그이의 붓길은 주제·소재·재료 등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듯 보인다. 많은 작가가 머리를 쥐어뜯는 구상에서조차 자유롭다. “방송을 하다가 불현듯 이미지가 떠오르고, 오늘 가서 그거 그려야지 한다. 그렇게 그린 게 진짜 살아있는 것 같고 그때 순수해진다,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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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림은 질문…왜 그리는가를 계속 묻고 있을 뿐”
그렇다고 그이의 붓이 마냥 편안한 건 아닌 듯했다. 캔버스 앞에 앉으면 “뭘 그리겠다는 것보다 또 무슨 변명을 하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이 든다니까. “그림은 나에게 캔버스가 던지는 질문이다. 내가 가진 수많은 편견과 어떤 방식에 대한 가치, 그런 걸 의심케 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끝까지 ‘질문’이라 하고 싶단다. “다들 전시장에 작가의 대답을 구경하러 가지 않나. 하지만 난 내가 왜 그리는가를 계속 묻고 있을 뿐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모티프가 다 결과는 아니라서란다. “내 손과 마음이 내가 생각한 것을 오해하고 나대는 걸 몇번 경험했다. 그림은 손에서 나오는 게 아니더라.” 그러면 마음인가. “마음도 아니다. 가끔 밴드에서 하는 얘기가 있다. 우리가 음악을 하는 게 아니라 음악이 우릴 노래하게 한다고. 그림도 그렇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그림이 날 그리게 만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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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왜 부를까 묻지 않고 부른 지 44년이란다. 그게 후회스러웠던 건가. 그이에겐 그림보다 그림에 대한 고민이 더 진하다. “뭔가 나를 속박하는 고정관념들이 있다. 그런 걸 일거에 소탕하고 순백, 순수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이 없을까. 그 고민이 나에겐 그림이다.”
‘화가 김창완’을 인터뷰하는 내내 단 한 번도 예상한 답변을 얻지 못했다. 번번이 세상 잣대를 비켜갔으며, 번번이 세상 상식의 허를 찔러댔다. 결국 그이가 자신의 그림에서 봐줬으면 하는 것이 그게 아니었을까. ‘제쳐둔 대가들’에게는 한없이 미안하지만, 진짜 대가가 거기 있었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