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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윤 미술평론가] 미술이 생긴 이래 수많은 미술가가 여러 이유로 자신의 얼굴을 그려 왔다. 스스로가 자랑스러워서 그리는 경우도 물론 있고, 모델을 구하기 여의치 않아서 거울 속 자신을 모델처럼 쓰기도 하고, 중요한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 그리기도 했다. 성장앨범을 찍는 것처럼 평생에 걸쳐 자기 얼굴을 그렸던 렘브란트, 자른 귀가 채 아물기도 전에 붕대를 칭칭 두른 자신을 그렸던 빈센트 반 고흐, 극한의 고통을 겪는 자신을 직시하며 기록한 프리다 칼로 등이 특히 자화상으로 이름을 알린 화가들이다.
중국 미술에도 유명한 자화상이 있다.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런슝(任熊·1823∼1857)의 그림 ‘자화상’(1856)이다. 도전적인 눈빛으로 정면을 직시하는 30대 중반의 빡빡머리. 힙합 바지 같이 벙벙한 하의를 입고, 엄청 큰 발로 우뚝 선 이 남자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런슝이다. 상의를 한껏 풀어헤쳐 마른 근육질 몸을 드러냈다. 우뚝 선 포즈가 늠름하다. 어째 화가라기보다는 소림사에서 무공을 연마하고 있는 무예가에 가까워 보인다. 움직임이 하나도 없는데도 그림 안에 에너지가 꽉 찼다.
생김새도 범상치 않지만, 그린 방식도 특이하다. 몸 부분은 꼭 유성매직으로 그린 것 같다. 선은 단순하고 입체감이 거의 없다. 반면 얼굴은 상당히 사실적이어서, 결국 몸통은 만화처럼 그리고, 얼굴은 사진처럼 그린 셈이다. 정반대의 방식을 한 화면에 사용했기 때문에 작품은 생경한 느낌을 준다.
◇177㎝ 거대 자화상이 전시공간 지배하도록 계산
작품의 크기는 무려 177㎝. 이 그림이 벽에 걸린다면, 천장 가까이 닿을 거다. 화가 스스로 자신의 모습이 전시공간을 지배할 수 있도록 계산해서 결정한 크기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아니 이게 무슨 벽화도 아니고 황제의 초상도 아닌데 누가 이렇게 자신을 크게 그린단 말인가. 이토록 넘치는 자기애를 가진 런슝은 도대체 누구일까.
런슝은 청나라 말 상하이를 중심으로 활동한 화가 중 하나다. 그냥 화가가 아니라 이름을 크게 날렸던 화가다. 결핵으로 30대 중반에 세상을 뜨면서 정작 작품활동을 한 것은 10년 남짓이지만, 그 명성은 생전부터 공고해 미술사에 길이길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문인의 품격을 갖추기도 했다. 시를 읊고 쓸 줄 알았고, 고전과 고대 철학에 박식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7현금을 연주하는 것은 물론 나무를 깎아 악기를 만들 줄 알았고, 철로 피리도 만들 수 있었다. 승마와 궁술에도 능했다.
물론 런슝이 구사하는 여러 ‘고급 기술’ 중 최고는 단연 그림이었다. 현재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그의 부채 그림(‘작약’ 연도미상)은 색채와 형태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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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점 그리진 않았지만 산수화도 일품이다. 예를 들면 ‘십만도’(연도미상). 장쑤성 쑤저우 지역의 수집가를 위해 그린 이 그림은 금색 배경 때문에 번쩍이며 화려하게 빛난다. 이는 아마 당시 상하이에서 취급하던 일본의 금빛 그림들에서 영향을 받은 걸 거다. 녹색과 검푸른 빛의 진한 색채가 금빛 배경 덕에 더욱 깊게 느껴지며, 험준한 바위와 초목의 오밀조밀함이 대비돼 시원하면서도 아기자기하다. 가히 그 무렵 돈 좀 있다 하는 재력가들이 탐낼 만한 솜씨다.
하지만 가장 주목받는 것은 역시 ‘자화상’이다. 자화상은 판매를 위한 그림이 아니다. 생각해보라. 아이돌 사진도 아니고, 누가 화가의 얼굴 그림을 사서 집에 걸어두겠는가. 그렇기에 자화상에는 그 어떤 장르보다 화가의 자의식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내가 그려서 내 집에 둘 거니까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내 이미지를 맘껏 연출해 그릴 수 있었던 거다. 반 고흐는 귀를 자른 순간에도 그림을 그리는 열정적 사람으로, 칼로는 온갖 고통을 뚫고 이겨내는 인간으로 자신을 묘사한 것이다. 그렇다면 런슝은 자신을 뭐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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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보았듯, 런슝은 자신을 무사처럼 그렸다. 화가가 자신을 무예가로 그린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그림 옆 글귀와 시대 상황을 고려해서 추측해 볼 수는 있다.
런슝이 직접 쓴 것으로 알려진 그림 옆 글은 “혼돈의 세상에 내 앞에는 무엇이 놓여 있는가” 따위의 깊은 한숨이 섞인 문장으로 구성돼 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때의 세상은 그의 말대로 혼돈 그 자체였다. 청나라는 몰락 직전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외교 정세는 극도로 불안정했고, 내부적으로는 태평전쟁이란 역대급 반란이 일어났다. 불완전한 기록이긴 하지만 런슝도 태평전쟁에 참여해 지도와 차트를 그리는 제도사로 일했다고 전해진다. 이 혼란한 시대에 자신을 굳센 무사로 그린 것은 스스로를 난세의 영웅으로 기록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케 하는 거다.
◇자신을 귀히 여긴 런슝, 역사에 남는 화가가 되다
동시에 런슝은 자신이 실력 있는 화가라는 것도 은연 중에 표현하고 있다. 서로 다른 방식을 한 화면에 사용한 바로 그것이다. 오래도록 중국에서는 문인의 그림과 직업화가로서의 그림이 달랐다. 거칠게 구분하자면, 문인들이 선과 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다소 추상적으로 그린 반면, 직업화가들은 극도로 사실적으로 그리며 묘사력을 뽐냈다. 그런데 런슝은 이런 상반된 기법을 한 화면에 담았다. ‘나는 두 가지 다 할 수 있지롱, 멋지지?’란 속마음을 영리한 방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럼에도 런슝은 자신을 그저 그런 직업화가로 여기진 않았다. 어떻게 아느냐고? 그의 손톱을 보라. 엄청 길다. 긴 손톱은 당시 상하이에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란 뜻으로 통했다. 다시 말해 런슝은 자신을 ‘매우 귀하신 몸’으로 여긴 거다. 하늘 높은 자존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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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화상’은 런슝이 사망하기 한두 해 전에 그린 것이다. 그 때문에 많은 학자는 이 그림에 ‘나를 이렇게 기억해줘’란 유언이 담겨 있다고 해석한다. 얼굴 옆에 쓴 “역사가 나를 기억하지 않아 슬프다”는 탄식의 문구는 그 주장에 신빙성을 더한다. 30대 중반에 유언을 담아 자기 얼굴을 그리는 것은 언뜻 이상해 보이지만, 그 무렵은 시대가 정말 혼란했다는 것을 기억하자. 특히 태평전쟁에서 30만명이 넘는 사람이 죽는 것을 목도했던 런슝은 더욱이 내가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겠다는 것을 체감했을 거다.
이 모두를 종합해보면 런슝은 후대가 자신을, 나라 위해 싸운 영웅으로, 실력 있는 미술가로, 존엄한 사람으로 길이길이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자화상을 남겼다고 결론지을 수 있겠다.
자의식은 중요하다. 나는 스스로를 별 볼 일 없는 메뚜기 같은 존재로 보는가, 아니면 거인 골리앗도 넘어뜨리는 잠재력을 가진 다윗으로 보는가. 내가 나를 어떻게 여기는지는 삶의 태도와 방향을 정하는 결정적 요소다. 런슝이 역사에 남는 화가로 자리매김한 것도 그가 자신을 존귀한 자로 여겼던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자, 그렇다면 질문이다. 내가 지금 나의 자화상을 그린다면 어떤 모습으로 그리겠는가. 연필을 들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과연 나는 나를 누구라 하는가.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