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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구출 실패가 전쟁금지한 자위대법 탓이란 日[김보겸의 일본in]

김보겸 기자I 2021.08.29 07:30:00

아프간 대피대상 500여명 중 일본인 1명만 구출
"위기대응 시스템 없어" "대사관 뭐했나" 비난
현행법 개정해 자위대 무력사용 허용하자 주장
작전서 중요한 건 무력 아닌 전략과 의지

일본 사이타마현 이루마 공군기지에서 항공자위대 수송기 C-2에 탑승하는 자위대원들(사진=연합뉴스)
[이데일리 김보겸 기자] 일본이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있는 자국민과 현지 협력자 500여 명 중 교도통신 통신원으로 일하던 일본인 1명을 구조하는 데 그치며 사실상 대피 작전에 실패했다. 지난 26일 자위대 수송기로 아프간인 수십명을 카불에서 파키스탄으로 이송한 사실이 28일 뒤늦게 알려졌지만 일본에선 “위급 상황에서 국가가 나를 구해줄 것이란 믿음이 사라졌다”는 하소연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일본인들의 분노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모습이다. 아프간 대피 작전이 실패한 건 자위대의 무력 사용을 금지한 현행법 때문이라는 주장이 힘을 받으면서다. 자위대에 무력 사용이 허용됐다면 일본 정부의 자국민 탈출 작전은 성공했을까.

◇“비상시에는 스스로 지키는 게 낫겠다” 자조

일본 정부의 위기대응 시스템 부재에 일본인들은 분노하고 있다. 미군이 아프간 관문인 카불 공항을 제어하고 있으니 자위대만 파견하면 대피 희망자들을 수월하게 이송할 수 있을 것이라 안일하게 판단했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 23일 기시 노부오 방위상이 “카불 공항에서의 안전은 확보되고 있다”며 자신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 사실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일본 정부가 대피를 원하는 이들에게 카불 공항까지 자력(自力)으로 올 것을 요구했고, 결국 이들이 공항까지 오는 길에 검문소를 세우며 경계를 강화한 탈레반에 발목이 잡히며 탈출이 무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탈레반 조직원(오른쪽)이 카불 공항으로 향하는 시민들의 가방을 뒤지고 있다(사진=AFP)
소식을 접한 일본인들은 “코로나 때도 그렇고, 지도부가 낙관론만 펼치며 유사시에 대비하지 않는 등 위기관리 능력이 낮은 건 일본의 민족성일지도 모른다”는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위기가 발생하면 정부를 믿지 말고 스스로를 지키는 게 일본인 개인으로서도 올바른 자세일지 모른다”는 자조 섞인 한탄도 나온다.

자국민조차 구하지 못한 대사관 직원들에 대한 분노도 거세다. 아프간 대사관에서 일하는 일본인 직원 등 12명은 지난 17일 영국군의 지원을 받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로 피신했다. 15일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한 지 이틀만이다. 분쟁 시 자국과의 유일한 소통 창구인 대사관이 아프간에 남아 있는 자국민들에게 연락을 취해 탈출을 돕기는커녕 누구보다 빠르게 도피했다는 사실에 일본인들은 분노했다.

“앞으로 외무성 직원이나 대사가 될 사람은 자국민 보호에 관한 연수를 철저히 받아야 한다”며 “보호해야 할 자국민을 내버려둔 채 맨 먼저 도망을 가나? 부끄러운 줄 알라”는 비난이 거세다.

도쿄올림픽에 동원된 자위대원들(사진=AFP)
◇실패 주범은 자위대 손발 묶은 현행법?

하지만 이 같은 분노는 기묘한 논리로 귀결되고 있다. 자위대의 무력 사용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상당히 공감을 받으면서다.

일본은 수차례 헌법 개정을 통해 집단적 자위권을 확대한 바 있다. 지난 2015년 아베 신조 정부는 자위대법을 개정하면서 유사시 자위대가 일본인을 수송할 뿐 아니라 무기를 사용해 경호하고 구조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번 아프간 대피 작전은 개정된 법을 적용하는 첫 사례였다.

다만 아직까지 자위대의 무기 사용은 일본인 보호에 한정하며, 긴급 피난 과정에서는 불허하는 등 법적 제한이 남아 있는 상황이다.

여기서 ‘전쟁가능한 일본’을 외치는 이들의 기묘한 주장이 시작된다. 자위대가 이번 아프간 대피 작전에 실패한 원인은 자위대의 행동반경에 제약을 가하는 현행법이니, 법을 정비해 족쇄를 풀어야 한다는 논리다.

자위대의 손발을 묶어둔 현 평화헌법이 아프간 대피 작전 실패 원인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 작전에서는 전략이 무력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위대가 단 한 명의 일본인을 구조하는 데 그친 건 무력을 사용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현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신속한 의사소통에 실패했으며, 무엇보다 자국민을 보호할 의지와 능력이 복합적으로 모자란 탓이다.

한국 정부와 협력한 아프가니스탄인 국내 이송작전이 시작된 가운데 카불로 복귀해 아프간인 이송 지원을 지휘하고 있는 김일응 주아프가니스탄 공사참사관이 한 아프간인과 포옹하고 있다 (사진=외교부)
한국 정부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희망자 전부를 성공적으로 대피시켰다는 점은 이를 방증한다. 우리 정부는 미국이 거래하는 아프간 버스회사에 협력자를 태운 뒤, 미군이 승인하는 인원에 대해선 철수해도 좋다는 탈레반 약정을 활용해 검문소를 통과시켰다. 이 과정에서 협력자들도 자신이 속한 기관별로 탄탄한 연락망을 유지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이송을 도왔다.

특히 급하게 아프간을 떠나며 현지인 직원들에게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한 한 외교관이 다시 복귀한 모습은 대피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건 전략과 의지라는 점을 보여줬다.

“이득 없는 곳에는 머무르지 않겠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미군 철수를 정당화하며 내세운 이 논리는 앞으로의 대외정책 방향을 암시한다. 50년 넘게 미국에 안보를 의존해 온 일본에서도 지나친 의존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아프간 사태를 계기로 방위 능력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은 일견 타당하지만 전략 없는 무력 허용은 더 큰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탈레반, 아프간 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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