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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대회이다 보니 흥행이 절실했다. 그래서 FIFA는 본선을 지원을 받아 치렀다. 현재 대륙별 쿼터를 두고 지역 예선을 거치는 방식과는 달랐다. 그럼에도, 관심은 차가웠다. 축구 종가를 자처하는 잉글랜드를 비롯해 유럽 주요국이 불참했다.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경제가 휘청여 축구에 눈을 돌릴 여유가 부족했다고 한다.
결국 참가국 미달 사태가 발생했다. 최소한 16개국이 출전해 4개 팀씩 4개조를 꾸리고자 했지만, 최종 참가국은 13개국에 불과했다. 우루과이와 FIFA가 참가 비용(항공료, 숙박료 등)을 부담한다고까지 하면서 구애를 폈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지못해 조 편성은 3개 조는 3개 팀씩, 1개 조는 4개 팀으로 조를 편성됐다.
대회는 각 조 1위 팀이 본선에 진출해 4강부터 토너먼트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치렀다. 4강에서 아르헨티나가 미국을, 우루과이가 유고슬라비아를 꺾고 결승에 올랐다. 우루과이가 아르헨티나를 4대 2로 이김으로써 초대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3위는 미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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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에 대한 몰입은 월드컵의 입지를 다지는 토양이 됐다. 우루과이는 2회 이탈리아 월드컵에 불참했는데, 유럽이 자국 월드컵을 홀대한 데 대한 반발이었다. 아르헨티나가 우루과이와 단교를 선언한 것도 상징적이다. 첫 월드컵 결승 패배에 대한 뒤끝 조처였다. 단교는 이후 정상화됐으나, 양국의 혈맹 관계를 고려하면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우루과이는 아르헨 도움으로 브라질에서 독립했다. 우루과이는 보답의 표시로 아르헨 국기의 태양을 본떠 자국 국기를 만들었다.)
이후 월드컵은 남미와 유럽의 열전으로 흘러갔다. 유럽의 식민지였던 남미는 축구로써 과거를 앙갚음하고자 하는 열의가 강했다고 한다. 사실 초대 월드컵을 유럽이 외면한 데에는 식민지 남미(우루과이)에서 치르는 대회를 얕본 측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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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변은 월드컵 저변을 확대하는 거름이 됐다. 한일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의 4위 성적이 대표적이다. 아직 깨지지 않는 아시아 국가 최초의 4강 진출 기록이다. 북한이 이탈리아를 꺾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도 유명한 경기다. 대한민국이 독일을 2대 0으로 깬 ‘카잔의 기적’(2018년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도 회자된다.
이제 월드컵은 FIFA 월드컵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인식될 만큼 성공적인 단일 스포츠 대회로 자리 잡았다. 초대 대회 흥행 실패와 스포츠의 정치화 파도를 넘어서 판정의 정교화 실력의 평준화, 기회의 동등함 등을 기반으로 여기까지 왔다. 다음 대회는 2026년 캐나다·멕시코·미국 3개국에서 열린다. 북미 3개국의 공동 개최는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의 성공에 힘입은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