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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윤 미술평론가] 1994년 6월 2일 오전 11시 30분 중국 베이징 외곽의 한 공용 화장실. 37.8도까지 치솟은 숨막히게 더운 날, 마스크를 쓰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악취 가득한 좁은 공간에 나체의 한 청년이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온몸에 꿀과 생선기름을 바른 채. 온갖 날고 기는 벌레들이 그의 몸을 뒤덮었고, 코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땀범벅이 된 남자는 가히 지옥의 예고편이라 할 수 있을 그곳에서 60분을 버티고서야 근처의 연못으로 걸어 들어갔다. 작가 장환(張洹·57)이면서 장환의 작품인 ‘12평방미터’(1994)다.
극한의 고통을 견디는 것. 이것이 1990년대 장환의 작업이고 작품이었다. 구역질 나는 화장실에서 벌레에게 온몸을 내줬던 것은 세 발의 피다. 굵은 철사에 묶인 채 한 시간을 천장에 매달려 있는 작업도 했다(‘65㎏’ 1994). 혈관에는 주사바늘을 꽂아 자신의 피를 달궈진 알루미늄 통으로 내려보내던 그때도 그는 맨몸이었고, 방 안에는 피 끓는 냄새가 진동했다.
뿐만이 아니다. 때로는 강철을 갈면서 튀는 불꽃 아래 나체로 누워 한 시간을 견뎠고(‘25㎜ 스레딩 스틸’ 1995), 고가 아래 누워 지렁이가 자신의 입과 코 위를 기어 다니도록 했으며(‘오리지널 사운드’ 1995), 얼음 위에 온몸을 대고 엎드린 채 저체온증으로 목숨이 위험해질 때까지 버텼다(‘순례: 뉴욕의 바람과 물’ 1998). 이 모두가 장환의 ‘바디아트’다.
◇백도 돈도 없이 맨몸으로 세상과 부딪치는 자신의 경험 녹여
아아. 괴롭다. 이런 게 정말 ‘아트’인가. 장환이란 사람은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예술이 정말 꼭 이래야만 하는 건가. 답을 하자면 ‘그렇다’. 적어도 29세의 장환은 그래야만 했다.
1965년 중국 허난성에서 태어난 장환의 본래 이름은 ‘둥밍’(東明)이었다. 마오쩌둥의 ‘둥’자를 딴 것이다. 자식의 이름에까지 마오쩌둥에 대한 찬양을 담을 만큼 충성분자였던 장환의 부모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우파로 몰려 재교육을 받으러 떠나야 했다. 한살배기 아들은 홀로 시골로 보내져 할머니와 살았다. 더럽다는 말로는 다 형언할 수 없는 공동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던 동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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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사망과 함께 시대는 결국 변했고, 할머니와 살던 아이는 장성해 베이징의 미술학교까지 졸업할 수 있었다. 둥밍이 아닌 장환이란 이름으로. 새 시대가 도래했다 해도 장환의 생활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춥고 배고팠다. 대충 타협하면 먹고 살 수는 있었다. 나라에서 직장까지 정해주던 시대였으니 입에 풀칠을 못할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장환은 그렇고 그런 직장에서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영혼 없이 일하는 것도, 부당한 대우도 싫었다. 그러니 직장도 돈을 얻을 수 없었다. 가진 것은 오직 몸뚱이와 열정뿐이었다.
같은 상황, 같은 마음의 청년 미술가들이 베이징 외곽으로 모여들었다. 인근 마을 사람들이 쓰레기 매립지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지금은 중국 현대미술의 한 획을 그은 곳으로 기록된 가난한 예술가들의 마을 ‘동촌’이다. 1992년부터 장환은 그곳에서 살며 신체예술이란 것을 시작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현대미술에서 ‘몸’이 재료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1950년대 말이다. 서양의 미술가들이 회화나 조각 같은 전통적인 미술에 지겨워지면서 새로운 재료와 형식을 시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1990년대 장환의 작품은 맥락이 전혀 다르다. 장환이 몸뚱이를 선택한 것은 백도 돈도 없이 맨몸으로 험난한 세상과 부딪쳐야 하는 자신의 경험을 녹여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디아트’라든지 ‘퍼모먼스’ 같은 주류 미술사의 건조한 용어를 갖다 붙이기에 장환의 작업은 너무도 절박했다.
당시 중국에서 몸을 예술재료로 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먼저 돈 문제. 장환이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벌레와 함께 앉아 있을 무렵, 베이징의 다른 편에서는 돈방석에 앉는 회화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장환은 동요하지 않았다. 고급 캔버스에 기름이 흐르는 총천연색 물감은 그 시절의 장환이 공감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중국 정부는 바디아트를 예의주시했다. 1989년 톈안먼사태 이후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다면 사시 눈을 뜨고 볼 때였다. 장환 또한 오픈 직전 전시가 취소되기도 하고, 벌금을 물기도 했으며, 퍼포먼스 도중 후다닥 마무리해야 하는 상황을 겪기도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작품 안팎의 맥락에서 ‘인내에 대한 믿음’을 읽을 수 있다. 장환의 작업은 고통을 드러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고통을 견딘다. 천천히 흘러가는 극한의 시간을 꼼짝 않고 버틴다. 약속된 시간이 지나면 퍼포먼스는 끝이 난다. 어려운 시간을 참아낸 뒤 유유히 연못으로 걸어 들어가 깨끗해지는 그를 볼 때, 그를 옥죄던 철근이 풀어질 때, 불꽃이 튀던 기계가 꺼질 때, 관람자는 안도감을 느낀다.
◇중년의 장환, 웃는 얼굴·해골 가득한 형형색색 회화 선보여
작품 밖에서도 장환은 경제적 어려움과 정부의 탄압을 견뎌냈다. 척박한 환경에서 맨몸으로 버티기. 이것이 장환의 삶이자 작품이었던 거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는 인내가 결국 승리한다는 예술가의 믿음이 담겨 있다. 우리는 흔히 말한다. 시간이 약이라고.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온다고.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그 말이 장환의 몸을 빌려 비로소 실체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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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두를 알고 장환의 작업을 대하자면 어떤 숙연한 마음도 든다. ‘인생을 걸고 그토록 절박하게 추구하는 것이 과연 내게 있던가’ ‘현실과 타협하기는 얼마나 쉽던가’ ‘적당히 대충 살면서 한 사람의 모든 것이 걸린 작품에 대해 쉽게 떠들어도 되는가’ ‘나는 얼마나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는가’ 등등의 생각이 들어서다. 징그럽다고 인상을 찌푸리고, 이해 가지 않는다고 고개를 돌려버리기에 장환의 몸부림은 절실하고, 메시지는 묵직하다.
춥고 배고픈 날들을 무사히 견뎌낸 장환은 요즘 꽃길을 걷는 중이다. 1990년대 그의 작업은 중국 현대미술사에 공고히 기록됐으며, 퍼포먼스·사진·조각·설치를 섭렵한 뒤 국제적인 스타작가로 발돋움해 세계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쓰레기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던 허름한 마을에 살던 장환은 현재 상하이에 커다란 스튜디오를 갖고 일류 미술관·갤러리와 일한다.
근래 그가 선보이는 것은 회화다. 형형색색 물감을 반 고흐가 울고 갈 만큼 두껍게 올린다. 멀리서는 흡사 추상화지만 가까이서 보면 웃는 얼굴과 해골이 가득한, 반전의 작품이다. 불교에 귀의한 뒤 티베트 불화로부터 도입한 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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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장환의 회화는 30년 전 그의 고통스러운 신체예술과는 아주 달라 보인다. 이런 변화를 두고 ‘생활이 피니 헝그리정신이 사라졌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변화는 당연하다. 명실공히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한 중년의 장환이 여전히 절박한 나체의 퍼포먼스를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다. ‘좋은 작품’은 작가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법이다. 작가의 삶이 변하면 작품도 변해야 마땅하다. 장환의 말처럼 그는 삶에서 작품을 길어올리는 작가니까. 장환의 작업은 그때나 지금이나 온몸으로 세상을 부딪치며 살아내는 생생한 기록이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