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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거래하는 은행에서 그림을 산다. 그런데 우리집으로 가져갈 순 없는 그림이다. 어째서? 그 그림을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거니까. 어차피 내 통장 잔고로는 덥석 잡아채기에 부담스러운 그림이니까. 그러면 그 그림은 어디로 가게 되는 건데? 은행이 보관해준단다. 원할 때는 언제든 보여준다고 했다.
자, 여기까지 들었으면 여러 질문이 나올 법하다. ‘은행에서 그림전시를 한다는 건가’ ‘집을 살 때처럼 대출을 받는 건가’ ‘대출금이 많을 때 은행집이라 하는 것처럼, 이것도 은행그림이 되는 건가’ ‘기껏 구매한 그림을 은행에 맡겨둬야 하는 거면, 뭐하러 샀는데?’
여전히 모호하지만 이 ‘그림 구매 미스터리’는 핵심 개념 한 가닥만 잡고 정리하면 쉽게 풀린다. 은행에서 산다는 저 그림은 감상이나 소장이 아닌 온전히 ‘투자’가 목적인 거다. 한 점당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유명작가의 유명작품을 몇몇이 나눠 사들인다는 거고, 규모에 걸맞게 그 판을 은행이 직접 나서서 깔고 운영·관리까지 해준다는 거다. 대출이 아닌, 이미 은행에 맡겨둔 ‘내 자산’으로.
이쯤 되면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형식이다. ‘미술품 공동구매’. 최근 MZ세대가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소액투자로 십시일반 미술품을 공동구매하는 ‘조각투자’. 다만 다른 점이라면 온라인상의 공동구매플랫폼 역할을 은행이 한다는 점이다. 일반 대중이 아닌 소수 참여자에 한 해, 거래하는 액수 역시 일정 규모 이상이기도 하고. 맞다. 바로 ‘큰손들을 위한 미술품 공동구매’인 거다.
◇고액자산가들, 미술품 공동구매·공동소유
‘부자들도 조각투자할 수 있다!’ 미술품 투자에 ‘큰손들의 공동구매’ 개념을 끌어들인 다소 파격적인 이 그림은 하나은행에서 나왔다. 금융권에선 사실상 처음 꺼내놓은 형태다. 가령 10억원짜리 작품을 5명이 2억원씩, 50억원짜리 작품이라면 10명이 5억원씩 나눠 구매해 공동소유하는 형태다. 이 퍼즐의 완성을 위해 하나은행은 지난달 미술품 경매사인 서울옥션과 업무협약을 맺었다. 고객에게 선보일 미술작품에 대해 소개를 받고 투자대상이 될 작품을 선정하는 작업을 서울옥션에 의뢰하겠다는 거다. 결국 고액자산가 고객을 확보한 하나은행이 미술품·미술시장 정보를 가진 서울옥션과 손을 잡고 추진하는 또 하나의 아트테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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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단추는 ‘파인 아트 신탁’이란 금융상품으로 끼운다. 이 신탁에 자금을 맡긴 ‘골드클럽 고객’들이 대상이란다. 골드클럽은 하나은행이 개인별 맞춤 자산관리를 위해 만든 전담 프라이빗뱅커. 상속증여나 부동산투자, 글로벌뱅킹, 라이프케어 등을 개발하고 추천하는 게 주요 업무인데, 여기에 ‘미술품 투자’ 항목을 추가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다시 말해 서울옥션으로부터 정보를 제공받은 작품을 소개하고, 투자자를 모집하고, 그 작품을 구매한 뒤 공동소유로 보관하고, 이후 작품을 판 뒤에 생긴 수익을 나누는 일까지 하나은행이 전담한다는 얘기다. 여기에는 약정했던 신탁기간의 종료시점에 작품을 판매하거나 신탁기간을 연장하는 등의 의사결정을 공동소유자로부터 취합해 결정하는 일도 들어 있다.
하나은행은 이미 2년 전부터 준비해온 일이라고 말한다. 2020년 4월 ‘아레테큐브골드클럽’의 오픈으로 윤곽을 잡았다는 건데, 그 위치가 서울 강남구 신사동 서울옥션 강남센터 2층이다. 장정옥 아레테큐브골드클럽 센터장은 “단순한 금융상품이 아닌 미술품 컬렉션이란 본질에 접근하는 형태”라고 상품을 소개한다. 이를 위해 투자자들에게 해당 작품에 대한 스터디 자료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이른바 커뮤니티 개념인 ‘컬렉터의 서클’을 만들어 작품·작가를 서포트하거나 투자자들의 교류를 주선하기도 한다는 거다. 흔히 ‘아트펀드’라고 말하는 형식과는 좀 다르다. “자금운용을 원하는 ‘누구나’에게 열려 있는 블라인드 금융상품이 아닌 1대 1 매칭이 중요하다”는 거다. 장 센터장은 “작품당 최대 10명을 안 넘게 구성하고 있다”며 “앞으로 두 달 내 ‘1호 작품’에 대한 결정과 승인이 이뤄질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렇게 공동구매한 미술품은 수장고로 옮겨 보관한다. 서울 중구 을지로 하나은행 사옥에 리모델링 중이라는 수장고는 “오는 6월쯤 오픈해 ‘보이는 수장고’로 프라이빗하게 운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보관 중인 작품이 수시로 들고 나지는 않을 듯하다. “구매 이후 기본 3년을 약정기간으로 유지할 것”이라고 했다.
현재까지 아르테큐브골드클럽은 40여명의 고객을 확보하고 있다. 이들이 맡긴 자산은 4000억원. 때가 되면 언제든 미술시장으로 흘러들 수 있는 돈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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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경매사들까지 뛰어든 ‘미술품 공동구매’
‘공동구매’ 개념이 미술시장에 끼어든 구도변화는 지난해 이미 본격화됐다. 다만 온전한 미술품을 1인(단체) 낙찰자에게 넘기는 거래를 주도하던 경매사의 지형도까지 뒤흔든 건 최근인데. 비단 하나은행과 업무협약을 맺은 서울옥션만도 아니다. 경매시장 90% 이상을 서울옥션과 독점하다시피 해온 케이옥션 역시 이달 초, 아트투게더(법인명 투게더아트)와 손을 맞잡았다. 아트투게더는 2018년 미술품 공동구매플랫폼 서비스로 첫삽을 뜨고, ‘1만원=1조각’부터 시작하는 대중의 소액자산을 기반으로 ‘미술품 조각투자 사업’을 이끌고 있다. 케이옥션은 자회사 아르떼크립토를 통해 아트투게더의 지분 19%에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케이옥션이 아트투게더에 미술품 구입이나 판매·경매 등에 대한 노하우를 제공하는 것을 기반으로 두 회사의 업무협약은, 미술품 분할소유권 판매와 유통·렌탈 등에까지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핵심은 ‘공동구매’ 형식의 미술시장 확장에 있다. 조각투자를 위한 작품의 범위, 매각구조 방식 등을 강화해 ‘아트테크 플랫폼 시장’을 치고 나가겠다는 계획인 거다.
MZ세대를 중심으로 한 ‘미술품 공동구매’ 열풍은, 지난해 둑 터진 미술시장과 무관치 않다. 여기에 비록 투자자가 실물은 쥐지 못한다고 해도 최소한 ‘미적 취향’이나 ‘예술적 성향’을 반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주식·코인과는 다른 매력을 가졌던 터. 그 단적인 ‘기록’이 최근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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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미술품 공동구매플랫폼 중 하나인 서울옥션블루 소투에서 단색조 화풍의 거장 이우환(86)의 ‘대화’(Dialogue·2019)가 1분 18초만에 팔린 거다. 작품가 12억원이 순식간에 ‘입금 완료’됐다. 이번에 거래된 ‘대화’는 그간 공동구매로 진행한 이우환의 작품 중 가장 비싼 그림. 12억원 공동구매액 중 52%인 약 6억 1000만원은 MZ세대가 구매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의 1인당 평균 구매금액은 58만 8292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