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부터 정보기술(IT) 분야를 담당하며 베스트 애널리스트로 이름을 날렸던 A연구원은 올 봄 독립리서치 기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11년 만에 두 번째 휴가를 내고 참석한 행사에서 ‘IT 1등 애널리스트’에 얽매여 다른 산업군의 시장 흐름을 파악하는 데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것을 깨달았다.
적잖은 충격을 받은 A연구원은 이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애널리스트라는 직업은 좋아하지만 새로운 콘텐츠를 접하고 싶은 바람을 이루기 위해 증권사를 박차고 나왔다.
“수도원에서 필사적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기록하는 필경사(筆耕士)처럼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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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들어 여의도 증권가에서 경력 10년 차 이상 베테랑 애널리스트들의 이직이 잇따르고 있다. 증권업계에서 베스트 애널리스트로 이름을 날린 인물들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이들의 이직은 업계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4월 금속·운송분야에서 잔뼈가 굵었던 방민진 전 유진투자증권 애널리스트가 삼성전자의 공급망 인사이트 테스크포스로 자리를 옮긴 것을 필두로 한 대형증권사 IT 분야의 A연구원이 독립리서치 기관으로 이직했다.
이달 중순에는 유통산업 리서치 분야의 대부로 불리는 박종대 전 하나증권 수석연구원이 몸담았던 증권사를 떠났다. 박 수석연구원은 이달 말 친환경 식품 전문 제조 기업 우리밀 대표로 새 출발을 한다. 2007년 CJ투자증권(현 하이투자증권)에서 애널리스트 생활을 시작한지 16년 만이다.
그는 “유통·의류·화장품 산업 선두에서 기업들을 직접 만나고, 분석한 내용을 투자자들에게 알리는 보고서를 쓰면서 보람을 느꼈던 시간들이었다”면서 “이제 애널리스트로서 소임을 다했다고 느끼고 체력이 될 때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여의도를 떠난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유통산업 리서치 전문성을 바탕으로 우리밀의 마케팅 채널을 확대하는 한편 친환경 분야로 사업군을 확장해 나갈 계획이다.
◇탈(脫) 애널리스트, 시대적 흐름?…“AI가 리서치 대체 불가능”
애널리스트의 이직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따라붙는 클리셰(판에 박힌 듯한 진부한 표현)가 있다. 주식시장 부진으로 실적이 악화하면서 과거에 비해 역할이 축소된 애널리스트의 이탈이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소위 잘 나가는 애널리스트들이 업계를 떠날 때마다 매년 빠짐없이 나오는 이야기다.
증권업계의 의견을 종합하면 이같은 분석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우선 애널리스트 숫자만 보면 최근 5년간 1000~1090명대를 유지했다. 올해 9월 기준 금융투자협회에 등록된 애널리스트(금융투자분석사)는 1066명으로, 지난해 1040명과 비교해 26명 늘었다. 국내외 증시에 불어닥친 한파로 코스피 지수가 지난해 ‘삼천피’에서 2200선으로 떨어지며 실적이 반토막이 난 상황에서도 인력은 오히려 증가한 것이다. 2018년과 지난해 최근 5년간 평균치인 1060.8명을 밑돌았으나 이듬해 모두 평균치를 회복했다.
증권업계를 둘러싼 환경 변화로 애널리스트들의 영향력이 과거에 비해 약해졌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이전에는 애널리스트들이 기관 대상 영업에 집중하며 보고서를 작성하는 게 주된 업무였다면 최근에는 달라졌다. 증권사들이 투자은행(IB) 사업을 키우고 기관 대상 영업 비중을 줄이면서 리서치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졌다. IT 기술 발달로 인해 시장과 개인 투자자들간 정보 비대칭성이 좁혀진 것도 이전과 달라진 점이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정보 접근성이 좋아지고, IB 사업 확대로 애널리스트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드는 추세로 가고 있는 건 사실”이라며 “공급과 수요 모두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다만 애널리스트의 위상 약화가 역할 축소로 이어지는 것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도 나온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를 활용한 IT 기술은 과거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분석하기 때문에 주식 트레이더와 애널리스트를 대체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박종대 전 수석연구원은 “없던 것이 새로 생기는 구조적 변화, 시대 변화를 간파하고 자본시장에 돌멩이를 던지는 일은 AI가 아닌 인간의 영역이자 애널리스트의 임무”라며 “통계적 추세선에서 볼 수 없는 미미한 시장 변화를 감지하고, 이를 분석해 투자자들에게 대안을 제시하는 애널리스트들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