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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9일` 샤넬 출생…여성해방에 드리운 나치 그림자[그해 오늘]

전재욱 기자I 2022.08.19 00:03:00

`에루샤` 3대 명품 이끄는 샤넬, 프랑스서 출생
생활고로 무도회장 가수 활동 당시 별명이 `코코`
여성에게 강조한 불편한 아름다움 탈피하고 실용의 미 추구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부역한 의혹으로 엇갈린 평가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에루샤(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로 대표되는 한국인이 선호하는 3대 명품 브랜드. 여기서 샤넬을 창시한 코코 샤넬(Coco Chanel)은 1883년 8월19일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Gabrielle Bonheur Chanel)이다. 불우한 유년기를 보낸 고아원을 나와서 생활고를 이기고자 한 일이 두 가지였다. 낮에는 재봉사로서 옷을 만들었고, 밤에는 무도회장에서 노래를 불렀다. 당시 무도회장에서 쓴 별명이 코코(Coco)였다. 이후 별명이 본명을 덮어버렸다.

리틀 블랙 드레스를 입은 샤넬의 모습.(사진=샤넬)
패션 디자이너로서 그가 쌓아올린 성과 가운데 하나가 `여성 해방`이다. 20세기 전후 여성복은 실용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코르셋으로 신체를 압박하고 밑으로 갈수록 펑퍼짐해지는 스커트는 여성의 미를 강조할 뿐이었다. 실생활에서 자유로이 활동하는 데에는 제약이 심했다. 샤넬은 왜 여성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러면서 1926년 발표한 `리틀 블랙 드레스`는 당대 패션계를 뒤흔들었다. 실용주의를 강조한 디자인과 검은색을 의상에 적용한 것이 이목을 끌었다. 당시 검은색은 기껏해야 상복에나 쓰였다. 그럼에도 검은색을 활용해 군더더기를 털어낸 실용적인 의상을 탄생시킨 것이다. 무릎 높이에서 끝나는 짧은 기장과 긴 소매로 만든 이 드레스는 여성의 활동성을 보장했다. 검은색이 상징하는 기존 체재에 대한 반항 의미를 여성복에 담은 점도 의미가 컸다.

샤넬 리틀 블랙 드레스는 여성들이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 던지도록 자유를 보장했다. 옷이 나온 시기는 1차 세계 대전이 막을 내리고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하던 때와 맞물렸다. 대중은 샤넬에 열광했고 패션 사업은 순항했다. 한때 수천 명이 넘는 노동자가 종사하는 양산복 브랜드로까지 사업을 일궜다. 그러나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한 노동자 파업이 발생하고 이 와중에 2차 세계 대전을 맞았다. 이를 계기로 전쟁 발발 이후 현역에서 은퇴했다.

다시 패션계에 복귀한 건 1954년. 전후 패션계가 화려하고 사치스러움에 물든 데 대한 반감이 그의 복귀를 불렀다고 한다. 패션에 다시 실용주의 기조를 심고자 한 것이다. 미국에서 그를 추앙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할리우드 여배우 사이에서 샤넬은 우아함과 명성의 상징으로 통했다. 시대의 아이콘 메릴린 먼로는 1960년 인터뷰에서 “샤넬 넘버5를 입고(뿌리고) 잔다”고 말할 정도였다. `샤넬 넘버 5`는 샤넬이 1921년 5월 발표한 현대 향수의 시초와 같은 제품이다. 패션계와 사교계를 주름잡은 그는 1971년 1월 숨을 거뒀다.

2011년 미국 언론인 핼 버허건이 펴낸 샤넬 전기 ‘적과의 동침’.(사진=아마존)
사후 그를 둘러싼 평가는 엇갈리는 이유는 나치 스파이라는 의혹 탓이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파리가 독일에 넘어가자 독일군 장교와 동거를 시작했다. 프랑스 정부는 전쟁이 끝나고 샤넬을 체포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처벌하지 못했다. 유죄를 증명할 증거가 마땅하지 않다는 것이지 무죄라는 건 아니었다. 이후 샤넬은 스위스로 망명했다. 샤넬이 나치 간첩이었는지 선명하게 밝혀진 게 없다. 미국 언론인 핼 버허건은 2011년 펴낸 샤넬의 전기 `적과 동침`(Sleeping With The Enemy)에서 샤넬이 나치에 부역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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