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랑서 개인전 연 작가 장이규
1992년부터 그린 '소나무가 있는 풍경'
'녹색 연구'에 소나무가 적절하다 판단
화려한 색 표현보다 묵직한 묵화 추구
문인화 정신으로 그린 유화 '상상 풍경'
'향수' 연작 '소나무 그림' 30점 걸어내
| 작가 장이규가 서울 종로구 인사동 노화랑 개인전에 건 작품 ‘향수’(2022·120×60㎝)와 ‘향수’(2022·120×60㎝) 사이에 섰다. 한여름을 온전히 품은 소나무 풍경들이다. 고도로 집중한 붓질로 빚은 이들 장면은 작가의 상상에서 나왔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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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날 선 푸름이라고 해두자. 어느 계절로 가든 어느 장소에 서든 기죽는 법이 없으니까. 가시 잎에 내려앉은 서릿발 같은 퍼런 옷을 하나씩 입고 각자도생 중이지만, 그렇다고 나만 잘난 독야청청만도 아니다. 먼 산과 한몸을 이루기도, 낮은 풀숲에 키를 맞추기도, 안갯속에 눈 둘 데를 잃기도, 높은 하늘을 우러르기도, 수평선 너머를 그리워하기도, 하얀 눈밭이 몹시 시리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사람 사는 모양과 지독하게 닮지 않았나. 소나무, 그것도 내 눈앞의 저 소나무가 말이다.
작가 장이규(68)의 ‘소나무’가 서울 종로구 인사동으로 돌아왔다. 요란한 치장 없이 ‘장이규 전’이란 타이틀을 걸고 노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6년 전 바로 여기서 그이는 벗이자 동료인 작가 이원희(66)와 ‘한국 자연의 멋’이란 테마로 2인전을 했더랬다. 2016년 당시 일었던 ‘화끈한 반응’을 생각하면 전시로 돌아오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린 셈이다. “학교에서 맡은 보직이 많다 보니, 개인전은 꿈도 못 꿀 지경”이었다는데, 곧이곧대로 믿을 말도 못 된다. 서울 나들이만 자주 못했을 뿐이지 그이의 개인전이 곧 60회를 맞는다는 얘기를 벌써 들었던 터다.
어쨌든 이제 훌훌 털어버렸단다. 2020년 2월 대구 계명대에서 정년퇴임하면서 “대학 예산절감차원에서 겸임할 수밖에 없었다”는 미술대학장직까지 내려놓고 진정한 전업작가로 돌아온 거다. 이번 개인전에는 그 의미까지 기꺼이 보탰을 거다.
| 장이규의 ‘향수’(2022·60×60㎝). 한여름 서늘한 그림자를 드리운 소나무를 우뚝우뚝 세웠다. 강한 채도와 짙은 명도로만 가른 소나무 군락이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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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파고드는 연구에 도구로 쓴 소나무
작가는 소나무를 그린다. 좀더 정확하게는 ‘소나무가 든 풍경’이다. 그런데 이게 단순치가 않다. 세상에 널리고 널린 ‘소나무 풍경’이라고 만만히 볼 게 아니란 얘기다. 길게 뻗은 몸통이며 솔잎 하나하나에 심은 청명의 기운이 산·들, 강·바다와 한바탕 어울려 화면을 뚫고 나올 듯하달까. 그렇게 고도로 집중한 붓질이 풍기는 힘 덕에 ‘실제보다 실제 같다’는 감탄을 뱉어낼 수밖에 없지만, 이는 적절치 않다. 그이가 그린 저 풍경이 사실을 묘사한 게 아니라니까.
맞다. 작가의 풍경은 작가의 머릿속 상상을 빼낸 거란다. 과연 이 절절한 자태의 소나무까지? “오랜 기간 녹색을 연구해왔다. 처음부터 소나무만 그리자고 고집한 게 아니다. 녹색연구에 치중하다 보니, 그 방식과 표현에 소나무가 적당한 도구고 적절한 소재가 됐던 거다. 형상보단 색채의 변화에 중점을 두는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 장이규의 ‘향수’(2022·90.9×72.7㎝). 희끗희끗 눈발이 남아있는 깊은 산세 앞에 줄지운 소나무들이 추위쯤은 아무렇지도 않는다는 듯 눈밭 위에 도도하게 섰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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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이규의 ‘향수’(2022·90.9×72.7㎝)의 부분. 강한 채도와 짙은 명도로만 가른 소나무의 색채감이 선명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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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깨질 듯한 선명한 여름, 눈밭이 한참 펼쳐진 하얀 겨울, 그이의 소나무가 사시사철을 포기하고 왜 굳이 두 계절에만 사는지에 대한 의문도 덕분에 풀렸다. “봄과 가을은 색이 많은 계절이라 잘 그리질 않는다”는 거다. “문인화 정신으로 유화를 그린다. 그래서 가능하면 화려한 색의 표현보다 묵직한 묵화의 느낌을 추구하려 한다.”
그러니 특별한 장소란 게 있을 수도 없다. “이런 구도에선 어떤 배경이 있으면 좋겠다” 하는 장면을 만든단다. 산도 세우고 하늘도 높이고 눈밭도 다지고 바다도 깔고. 그렇다고 실경이 아예 없진 않다. 이번 전시에는 두 점이 나왔다. 거제도를 배경으로 한 ‘향수’(2022·116.8×80.3㎝)와 ‘향수’(2022·60×60㎝)다. 육지에서 내다본 바다가 아닌, 바다에서 육지를 바라보고 만든 작품들에는 강한 채도와 짙은 명도로만 가른 작가의 ‘소나무 세상’이 제대로 보인다. 그 둘 사이에 오롯이 ‘향수’란 작품명 하나로만 내건 10∼50호 크기의 나머지 28점(2022)이 풍경 속의 풍경처럼 점점이 박혀 있다.
| 장이규의 ‘향수’(2022·116.8×80.3㎝). 상상의 풍경을 그린 다른 전시작과 달리 실경인 거제도를 배경으로 한 두 점 중 하나다. 흔히 육지에서 내다본 바다가 아닌, 바다에서 바라본 육지를 그렸단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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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잘 그리는 작가’로 일찌감치 싹을 틔웠다. 서른한 살 젊은 작가가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구상부문 대상을 받으며 단번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런데 “당시 수상한 작품은 인물화”였단다. 이후 대구미술대전 등을 두루 휩쓴 공모전에서도 단연 인물화가 주를 이뤘고. 정작 그이의 소나무가 탄생한 건, 역설적이게도 그 찬란한 족보를 내려놓으면서다. 그것도 ‘옆 사람이 찔러서’ 말이다. “1992년 개인전을 열면서다. 당시 갤러리 대표가 소나무를 소재·주제로 한번 해보자 했던 게 시작이다.”
사실 운명을 좇자면 더 거스를 수도 있다. 까까머리 학창시절이다. “경주 계림숲에서 수채화를 그릴 때부터라고 할까. 여름 무성한 가지를 늘어뜨린 나무를 그리는데, 유화가 아니라선지 앞뒤로 선 나무들을 아기자기하기 표현하기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어려움이 평생의 숙원작업을 안겨 준 결정적 계기가 된 거다. “얽히고설킨 색의 실타래를 끄집어내기가 힘들어, 그거 한번 해결해보자는 게 목표가 됐다.” 바로 색채연구에 몰입한 것을 두고 하는 소리다.
| 서울 종로구 인사동 노화랑 ‘장이규 전’ 전경. 한 관람객이 허리를 굽힌 채 작품 속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다. 작가의 작품은 누구든 가까이 다가서게 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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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으로 ‘대구’ 명맥 잇는 ‘영남학파’ 대표주자로
작가를 말하려면 ‘대구’ 얘기가 빠질 수 없다. 경북 경주에서 나서 대구 계명대로 진학했고 결국 계명대에서 교수로 정년퇴임까지 했으니 그이를 죄기도 풀기도 했던 생활터전이란 점이 그 하나다. 다른 하나는 한국미술계에서 차지한 ‘대구’란 상징. 알려진 대로 대구에서 나고 활동한 ‘대구 작가군’이 범상치 않다. ‘대구의 거장’이라고 칭하는 이인성(1912∼1950), 이쾌대(1913∼1965)를 선두로, 이들의 밭이 돼준 서병오(1862∼1936), 서동진(1900∼1970)을 비롯해 곽인식(1919∼1988), 서세옥(1929∼2020), 박현기(1942∼2000) 등 작고 작가, 또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는 김구림(86), 곽훈(81), 이강소(79), 최병소(79), 김호득(72)에 이르기까지. 그 줄을 ‘장이규’란 이름이 잇고 있는 거다. 그냥 잇는 것만도 아니다. ‘영남화파’라는 튼실한 곁가지를 냈는데, 자연을 배경으로 색과 감성을 얹는 대구 출신 구상작가 그룹을 이끄는 선두주자로 말이다.
| 작가 장이규가 서울 종로구 인사동 노화랑 개인전에 건 작품 ‘향수’(2022) 연작 사이에 섰다. 오른쪽부터 안개를 배경으로 한 ‘향수’(2022·72.7×116.8㎝), 깊은 산세를 뒤로 한 ‘향수’(2022·72.7×116.8㎝), 멀리 바다를 내다보는 ‘향수’(2022·72.7×116.8㎝)가 차례로 걸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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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녹색을 심화한 청회색으로 색의 진전을 보기도 했단다. 묵화에서 나오는 여백을 안개로 어떻게 더 잘 드러낼까도 고민 중이란다. 어찌 됐든 “유화물감 냄새 찐득한 곳에 차분하게 붙이는 기본에 가장 충실한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가. 세상의 모든 ‘기본’은 모조리 지독하고 빠짐없이 집요한 법이다. “촌놈 그림 같고 의식 없는 단순한 작업을 하는 것처럼 취급받아 외롭기도 했다”는 고백이 절로 나온다. 그래도 그 끝에 “작품을 제작하는 게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일 아니냐”며, 보람이 적잖다고 했다. 맞다. 왜 아니겠나. 현실보다 더 지독하게 살아남은 소나무를 저토록 장구하게 세워두지 않았나. 전시는 3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