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차량 테러가 일어난 당일 밤, 스페인 경찰은 해당 테러 사건의 범인을 잡지는 못했으나 추가 테러는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 하지만 2시간 뒤 이른 새벽 바르셀로나에서 120㎞ 떨어진 캄브릴스 도시에서도 5명의 괴한이 대로를 전력 질주해 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두번째 테러 용의자들은 경찰을 피해 도주하려다 차가 전복돼 현장에서 전원 사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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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이게도 이 세 번의 사건들은 모두 연관돼 있었다. 주택 폭발 사고로 인해 폭탄 테러를 준비하던 조직은 테러가 불가능해지자 차량 테러로 선회한 것이었다. 3일에 걸쳐 일어난 사건 사고들은 모두 연쇄 테러의 ‘고리’였다.
더군다나 사상자들은 스페인,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벨기에, 페루, 루마니아, 아일랜드, 쿠바, 그리스, 마케도니아, 영국, 오스트리아, 파키스탄, 대만, 캐나다, 에콰도르, 미국, 필리핀, 쿠웨이트, 터키, 중국 등 최소 24개국 국적자들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 중 한국 국적자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2015년부터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에 의해 프랑스 파리·니스, 벨기에 브뤼셀, 독일 베를린, 영국 맨체스터 등 서유럽 등지에서 테러가 일어날 당시 ‘테러 청정국’으로 여겨지던 스페인에서 연속 테러가 발생했다는 것은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죽음을 맞닥뜨릴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가 유럽 사회를 파고 들었다.
그럴수록 연쇄 테러가 ‘어떻게’, ‘왜’ 일어나게 된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인 IS(Islamic State)는 당시 일어난 스페인 연쇄 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발표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반IS 연합에 대한 보복이라는 것.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를 내놓지는 못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IS라는 큰 조직보다 개인이 행한 테러일 수 있다는 의견과 함께 단순 스페인을 향한 보복이 아닌 전 세계를 겨냥한 보복이라고 보았다. 그 안에는 혐오와 차별이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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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사건의 배후였던 이슬람 성직자(이맘) 압델바키 에스 사티(사건 당시 40세)는 2000년대 초반 스페인으로 넘어와 자신이 이슬람 급진파라는 사실을 숨기고 극단적 폭력 사상을 전파했다.
그가 노린 것은 스페인에서 터전을 잡고 살아가고 있지만 스페인 사람은 아니라는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고 있는 모로코인들이었다. 그들 사이를 파고들어 ‘삶’보다는 ‘죽음’에 초점을 맞춘 사상을 전파해 급진화시켰다. 2014년 종교적 활동에서 테러 조직으로의 변모한 이들은 차량 테러를 일으키기 전까지 함께 생활하며 테러를 계획했다.
그들의 본래 테러 대상은 3곳이었는데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한 바르셀로나의 대표적 가톨릭 성당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과 FC 바르셀로나의 홈구장이자 세계에서 11번째로 큰 경기장인 캄프 누 그리고 에펠탑이었다.
하지만 차량 테러 전날 주택에서 일어난 폭발로 사티가 사망하자 조직원들은 흩어져 각각 차량 테러를 저질렀던 것이었다.
해당 사건 이후 많은 시민이 거리로 나와 테러 사건에 대해 애도를 표했으며 FC 바르셀로나 축구팀은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하고자 선수들이 훈련 전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그 주 열린 라리가 개막전에서는 선수들이 자신의 이름이 아닌 ‘바로셀로나’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뛰었다.
바르셀로나의 라이벌 클럽인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애도를 표했고 훈련 시작 전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다른 나라 정부들도 이번 테러 사건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4년 후 스페인 법원은 차량 테러를 감행했던 조직원 중 붙잡힌 모하메드 훌리 켐랄(24)과 드리스 오카비르(32)에게 테러 모의 등 혐의로 각 징역 53년 6개월과 징역 46년을 선고했다. 폭탄 재료 구입을 도운 사이드 벤 이아자(28)에게는 테러조직 협력 혐의로 징역 8년이 선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