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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4일 일본 정부는 베이징 올림픽에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했다. 이를 두고 일본 정가에선 ‘이지메(집단 괴롭힘)’에 시달린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사실상 아베 신조 전 총리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 것과 다름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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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지난달 6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이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외교적 보이콧을 공식화한 날이다. 이날 도쿄 한 호텔에서는 자민당 최대 파벌인 아베파(95명)의 정치자금 모금을 위한 파티가 벌어졌다. 파티 티켓을 판매해 정치자금으로 쓰는 식이다.
처음엔 화기애애했다. 2000여명이 참석한 파티에서 아베 전 총리가 내내 강조한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아베파가 자민당 최대 파벌이라는 점, 그리고 기시다 정권을 지지하겠다는 의지다. 단순한 덕담으로 보긴 어렵다는 게 정가 시각이다. 물밑에서 치열하게 권력투쟁을 벌이는 일본 정치 1번지 나가타초에선 겉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아베 전 총리는 이 자리에서 돌연 중국을 언급했다. 중국을 향해 “군사력을 바탕으로 일방적인 현상 변경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고 지적하는가 하면, 중국과 일본이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센카쿠를 거론하며 “우리 손으로 지켜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다.
일본 정계에선 아베 전 총리가 일부러 중국을 언급한 건 동북아 평화를 추구하는 기시다 총리를 압박하려는 시도로 본다. 입버릇처럼 “아베파는 최대 파벌”, “기시다를 지지한다”고 말해 온 아베 전 총리의 ‘혼네(속마음)’은 사실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기시다 총리가 지나치게 리버럴로 물들면 ‘최대 세력’인 아베파는 총리 지지를 철회할 것이다.”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외교적 보이콧 동참 압력은 점차 커졌다. 지난달 13일 아베 전 총리는 BS닛폰에 출연해 “시간을 벌어서 무슨 이득이 있느냐”라고 하소연하며 일본 정부가 하루빨리 보이콧에 동참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에 기시다 총리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이웃나라와의 근린을 중시하는 고치카이파의 전통에서도 한발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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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전 총리는 기시다 총리와 껄끄러운 관계다. 지난해 치러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아베 전 총리가 전폭 지원한 이는 기시다 전 총리가 아닌 다카이치 사나에 현 정조회장이다. ‘여자 아베’로 불리는 다카이치는 A급 전범을 합사한 야스쿠니 신사를 줄곧 참배하는 대표적 극우파다. 아베 전 총리가 다카이치를 민 건 자민당의 리버럴화에 불만을 갖는 보수파가 늘고 있으니, ‘진정한 보수정당’의 모습을 제시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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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 총리는 인사뿐 아니라 정책에서도 아베 전 총리와 선을 긋고 있다. 지난달 21일 기자회견에서 기시다 총리는 성장 정책으로 “분배를 실시함으로써 성장을 지탱하는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 그다음 성장에 연결한다”고 설명했다. 기시다 내각의 경제기조가 성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아베노믹스와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평가다. 아베 전 총리는 발끈했다. 같은 달 26일 TV방송에 출연해 “경제정책 근본적 방향을 아베노믹스에서 바꿔선 안 된다. 시장도 그러길 기대하고 있다”고 반박하면서다.
건강상 문제로 물러난 이후에도 아베 전 총리는 연일 발언 수위를 높이며 보수층 결집에 주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개헌 문제다. 일본을 전쟁가능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 기시다 정부가 개헌을 완수해야 한다고 압박하는 상황이다. 자민당 관계자는 일본 주간지 일간겐다이에 “보수파의 대표격인 아베가 선수를 쳐 버리면 기대치가 커지는데, 기시다가 이와 다르게 행동하면 실망도 커진다”며 “그렇게 될 경우 기시다 내각 지지율이 떨어진다. 이것이 아베의 이지메 방식”이라고 꼬집었다. 사상 최장 정권을 지낸 아베 전 총리에게도 개헌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정작 비둘기파인 기시다 총리에게 떠넘기고 있다는 지적이다.
아베 전 총리의 이지메 방식은 우려를 낳고 있다. 전직 총리로서 막후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아베 전 총리의 의지가 물론 정치인으로서는 자연스러운 모습일 수 있지만, 외교안보를 그 도구로 쓰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전직 자위대의 한 간부는 “중국 (무력위협)에 대한 대비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전쟁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라며 “마지막 순간까지 외교로 전쟁을 피하려 노력해야 마땅하다”고 지적했다.
*독자님들. 새해가 밝았습니다. 3월 대선으로 정치부에 파견을 왔습니다. [김보겸의 일본in]은 잠시 쉬어가겠습니다. 선거 끝나고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