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섬'을 욕망하다[이윤희의 아트in스페이스]<21>

오현주 기자I 2022.01.29 00:01:00

▲폴 고갱, 아르놀트 뵈클린의 붓이 머문 '섬'
식민지 지배 타이티섬서 고갱, 풍요로운 낙원 그려
뵈클린 그린 죽음·삶의 섬, 고요·역동 극과 극 대비
고갱과 뵈클린 섬 모두 이방인 꿈 꾼 '환상의 소산'

폴 고갱이 타히티섬에서 그린 ‘망고와 여인’(1896). 후기인상파를 대표하는 작가인 고갱은 1891년 남태평양 타히티섬으로 처음 이주한 뒤 2년 동안 독특하고 과감한 색채가 돋보이는 회화 60여점을 그렸다. 하지만 고독과 향수에 시달리고, 무엇보다 돈이 떨어지자 1893년 고국 프랑스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후 1895년 다시 타히티섬, 1897년 다시 프랑스로의 여정을 반복했다. 작품은 두 번째로 찾은 타히티섬에서 그렸다.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을 강렬하고 원시적인 색감에 묻혀낸 작품들 중 한 점이다. 캔버스에 유채, 97×130㎝, 러시아 모스크바 푸시킨미술관 소장


200여년 전 소설 ‘오만과 편견’이 탄생한 곳은 낡은 책상이었답니다. 종이 몇 장과 잉크병, 깃대펜이 전부인 그곳이 바로 영국작가 제인 오스틴의 작업실이었던 셈입니다. 장서가 그림처럼 꽂힌 책장, 큼직한 책상이 근사한 ‘서재’란 공간은 남성 작가만 차지할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재뿐인가요. 화가의 공간이던 ‘아뜰리에’도 그랬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카페’와 ‘술집’ ‘광장’도, 한 가정집의 ‘부엌’과 ‘식당’ ‘침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해 있던 공간이지만, 그곳이 모든 이들에게 늘 공평했던 것은 아니었던 겁니다. 오랜 시간 미술관을 일터로 삼아온 이윤희 큐레이터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때론 객관적 기록으로, 때론 상징을 담아, 때론 비틀린 풍자를 숨겨낸 ‘그림으로 읽는 공간이야기’ ‘그림으로 읽는 사람이야기’입니다. 주말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윤희 큐레이터·미술평론가] 폴 고갱(1848∼1903)이 고국 프랑스를 떠나 타히티섬에 갔던 일은 유명하다. 아마도 우리가 타히티란 지명에 익숙한 것은 고갱 덕분일지도 모른다. 증권회사에 다니던 고갱이 주식시장 붕괴로 전업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프랑스와 덴마크의 여러 지역에서 작품활동을 하다가 타히티섬에 처음 찾아간 것은 1891년이다. 문명을 버리고 오지를 찾아간 화가의 굳은 결단이라기에는, 이미 당시 타히티섬은 프랑스 식민지로 귀속돼 서구문물이 많이 퍼져 있던 상태였다. 여인들이 스스럼없이 옷을 벗고 다니고, 먹을거리가 풍부하고, 문명인의 고뇌가 없는 이상세계를 꿈꿨던 고갱은, 생각과는 다른 모습에 다소 실망을 했다.

하지만 이내 타히티섬 곳곳에 남아 있는 원시매력에 푹 빠져들었고, 마흔네 살 기혼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곳 부족장의 열세 살 난 딸과 결혼을 했으며, 프랑스에서 이미 매독에 걸린 상태였기 때문에 갓 결혼한 어린 부인은 물론 십대의 다른 소녀들에게도 매독을 옮겼으며, 그네들은 그런 상태에서 출산을 하기도 했다. 고갱은 태어난 아이들을 양육하는 책임을 지진 않았다. 풍습이 다른 식민지 섬에서 자국의 법과 도덕을 위배한 성적 방종이 고갱에게 죄책감을 주진 않았던 것 같다. 당시 타히티는 프랑스 총독부의 관할 아래 물자·자원을 착취당하고 있기도 했다.

고갱의 ‘망고와 여인’(1896)은 푸른 바다가 있는 언덕에 나체로 누워 있는 여인을 그린 것이다. 슬쩍 몸을 가리고 비스듬히 누운 여인의 포즈는 단박에 서양의 비너스 그림들을 떠올리게 한다. 서구 그림의 전통적인 주제, 그러니까 비너스나 성모자상 같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주제에 타히티섬 여인들을 동원해 그리는 것은 고갱이 종종 사용하던 방법이고, 이러한 그림들은 유럽인을 대상으로 판매하기에도 좋았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의 여인 곁에는 망고열매가 나뒹굴고 있는데, 열대과일 망고는 고갱이 여인들의 손에 들려 그리거나 정물만으로도 그렸던, 애호한 소재였다. 푸른 바다와 하늘, 그 아래 푸릇푸릇한 나무그늘 아래 벌거벗고 누운 타히티 여성은 과연 풍요로운 낙원을 느끼게 한다.

◇고갱이 그린 ‘망고와 여인’, 그 암울한 이면

하지만 남태평양 한가운데의 식민지 섬에서 낙원을 느끼는 것은 지배국 남성의 과도한 낭만이 아니었을까. 고갱이 그린 타히티 그림들은 이내 고정 컬렉터가 생겼고 큰 명성도 안겨줬지만, 타히티섬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어떻게 봤을까. 그들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생계를 유지하고 전통문화가 있었으며 말과 복장이 다른 타국의 지배자들이 멋대로 건물을 짓고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을 지켜봐야 했을 것이다. 모델이 된 여성들이 프랑스에서처럼 제대로 모델료를 받았을지도 의문이거니와, 필시 고갱의 성적 대상이 됐을 것이란 짐작까지 가능케 한다. 고갱에게 타히티섬은 자신의 독창적 예술형식에 걸맞은 소재를 제공한 개인적 식민지가 아니었을까.

식민지 섬이 아니더라도 섬은 인간에게 어떤 환상을, 그것이 아름다움이든 공포든, 지금 발 딛고 있는 이곳과는 다른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것 같은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예컨대 스위스화가 아르놀트 뵈클린(1827∼1901)이 그린 한 쌍의 섬, ‘죽음의 섬’(1880)과 ‘삶의 섬’(1888)은 섬에 대해 인간이 가지는 양가적 감정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아르놀트 뵈클린의 ‘죽음의 섬’(1880). 자주 또 반복적으로 죽음을 암시하거나 주제로 삼은 뵈클린이 그린 여러 ‘죽음의 그림’ 중 대표작이다. 침묵과 고요, 꿈꿀 수 있는 장소로 죽음과 섬을 동일시했다. 풍부한 상상력이 바탕이 된 독특한 감각과 색채가 분위기를 극적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캔버스에 유채, 110.9×156.4㎝, 스위스 바젤 바젤미술관 소장.


‘죽음의 섬’은 오래 바라보게 되는 그림이다. 죽음의 세계를 이토록 지독한 외로움으로 그려낸 그림이라니. 어떠한 전거 없이도 그림은 그 자체로 무덤인 섬으로 보는 이를 안내한다. 거대한 바위를 깎아 만든 섬에는 배를 정박할 입구가 나 있다. 섬을 장식하는 나무는 유럽의 공동묘지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이프러스다. 사이프러스는 섬 가운데 컴컴한 숲을 이루고 있어, 그 안쪽 통로로 들어서면 빛을 볼 수 없을 것만 같다. 사이프러스숲을 감싼 바위들에는 조각된 문의 형태가 보이는데, 각각이 무덤인 듯하다. 서구는 오랜 석관의 전통이 있고, 작은 건물처럼 가족묘를 돌로 만들기도 했으므로, 건축물의 일부처럼 보이는 바위의 문들은 무덤의 부분으로 쉽게 식별할 수 있다.

◇혼자 겪는 가장 고독한 과정…‘죽음의 섬’ 가는 일

이 그림은 극도로 고요하다. 밤바다를 노 저어가는 소리조차 어둠에 묻힐 듯하며, 바람도 불지 않고, 흔한 새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노를 젓는 금발의 남성과 흰 망토를 머리끝까지 두른 사람은 각자 섬을 향해 있고, 서로 대화를 나눌 것 같지도 않다. 고요하게 섬으로 전진하고 있는 배 위에는 하얀 천으로 싸인 상자가 있는데, 아마 관인 듯하다. 흰옷을 입은 사람은 누구일까. 어둠 속에서도 흰옷 입은 사람의 그림자가 하얀 관 위에 짙게 드리워져 의문은 더욱 커진다. 망자의 관을 운반하는 안내자일까, 아니면 관에 누운 사람의 영혼인가. 배는 곧 섬의 안쪽 입구에 당도할 것이고, 하얀 관은 어둠 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그림에서 인간의 죽음은 드라마틱한 어떤 사건도 없이, 죽은 이의 사연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이, 그저 소리 없이 외딴섬에 가닿는 것으로만 묘사돼 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혼자 겪어야 하는 이토록 고독한 과정일 것이므로.

뵈클린은 이 그림을 여섯 번 반복해 그렸고 2차대전 중 폭격으로 파괴된 한 점을 제외하고 다섯 점은 각국의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바위섬의 형태와 하늘빛이 조금씩 달라지고, 후원자의 요청에 따라 관에 꽃을 두르거나 하는 변형이 있긴 했어도, 흰옷을 머리끝까지 둘러쓰고 선 사람의 모습은 변한 적이 없다. 뵈클린에게 흰옷을 입은 사람은 죽음의 알레고리일 것이다. 뭐라 따로 표현할 길이 없는 죽음의 실체에 그는 유령 같은 뒷모습만 부여했고, 앞모습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아르놀트 뵈클린의 ‘삶의 섬’(1888). ‘죽음의 섬’ 연작 이후에 뵈클린이 옮겨간 ‘삶이 있는’ 섬 그림이다. 색·소리·분위기 등의 대비를 의도해 죽음과는 다른 삶·생명을 묘사했지만 ‘죽음의 섬’만큼 큰 주목은 받지 못했다. 고대 신화에서 영감을 얻은 ‘반인반수’ 등은 뵈클린이 즐겨 사용한 장치다. 마호가니 나무에 유채, 93.3×40.1㎝, 스위스 바젤 바젤미술관 소장.


여섯 점의 ‘죽음의 섬’을 그리고 나서 뵈클린은 ‘삶의 섬’ 한 점을 그렸다. ‘삶의 섬’에서는 다양한 나무들이 제멋대로 자라나고 있다. 야자수부터 색색의 꽃을 피우는 꽃나무까지 푸른 하늘 아래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 섬 아래에는 물에 들어가 노는 사람들이 보이고 여러 마리의 백조가 그들 곁에서 헤엄치고 있다. 갈색 수염을 기른 남자는 반인반수 사티로스(그리스신화에서 반은 사람이고 반은 짐승인 괴물)처럼 보이지만 하체가 물에 잠겨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 섬 위에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색색의 사람들이 화관을 쓰고 즐겁게 어울리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섬으로 훌쩍 ‘한달 살이 떠나는 이유

이 그림에는 소리가 있다. 첨벙거리는 소리, 즐거움에 넘치는 사람들의 소리 말이다. 뵈클린은 ‘죽음의 섬’과 대응하는 ‘삶의 섬’에서 여러 대척점을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섬 모양과 나무, 사람과 동물의 생기 있는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소란스럽고 역동적인 이승의 단면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의 섬’과 비교해 봤을 때, ‘삶의 섬’은 밀도가 대단히 떨어진다. 죽음에 고도로 집중해 완벽하게 고요한 풍경을 만들어냈던 것만큼, 삶의 생동감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형태를 찾진 못한 것 같다. 하지만 그럴 만하다. 삶은 원래 지나치게 가지각색이지만, 죽음은 오롯이 한 길이기 때문이다.

고갱의 섬도 뵈클린의 섬도 결국은 환상의 소산이다. 섬이란 공간은 원시적 이상세계라거나 삶과 죽음의 상징을 덧붙이기에 알맞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내가 선 이 장소와는 다른 일이 펼쳐지리라 기대되는, 땅이면서도 독자적이고 세상의 부분이면서도 세상을 떠나 있을 것만 같은 장소기 때문이다. 물론 섬사람이 아닌 이방인의 시선에서 말이다. 그러니 일상에 지친 이들이 어느 순간 배낭을 메고 섬에 가서 ‘한 달 살기’ ‘한 해 살기’ 등의 프로젝트를 감행하는 것일 게다.

△이윤희 큐레이터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해외여행 자유화 덕분에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누구나 들렀던 어느 미술관에서 뜻밖에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그 수많은 작품을 설명하는 언어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도 함께였다. 이화여대에서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론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를 시작으로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치며 오래전 그 렘브란트의 감동을 현장으로 옮겼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 ‘여성의 눈으로 보는 미술 키워드’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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