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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윤 미술평론가] 당연한 말이지만, 본디 중국에는 ‘중국화’라는 것이 따로 없었다. 비단이나 종이에 먹과 색을 올려 산수화, 화조화, 인물화 등을 (종종 글과 함께) 그리는 것이 그림이었다. 세상의 중심은 중국이라 믿어도 별 무리 없던 시절이었다. 서구 열강이 중국의 문을 두드리고서야 ‘서양화’와 ‘중국화’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서양에서 온 것은 서양화, 원래 우리의 것은 중국화. 이런 구분이었다. 구분은 했지만 배타적이지는 않았다. 서양의 사람은 중국의 것을, 중국의 사람은 서양의 것을 흥미로워했고, 조화를 이루려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이 과정에서 서양인 선교사들의 역할이 컸다. 중국에 성서의 내용을 전해야겠는데 말은 안 통하니 그림이 필요했고, 서양화를 처음 보는 사람들도 거부감 없이 그림을 보도록 하려니 창의적인 융합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중국에 머물던 각국의 선교사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을 꼽자면 주세페 카스틸리오네(1688∼1766)를 들겠다. 이탈리아 밀라노 사람이었지만, 26세부터 78세까지 무려 56년 동안 베이징에서 청나라의 황실화가로 살다 떠난 인물이다. 모셨던 황제만 셋이다.
카스틸리오네는 열아홉 살 때 예수회에 들어갔는데, 그림을 잘 그리는 수도사로 이름을 제법 알렸다. 중국에 건너가게 된 것도 이탈리아와 청나라 사이의 외교에 그의 그림 솜씨가 활용됐기 때문이었다.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청을 세운 만주족은 외국인의 포교활동에 문을 열어 주면서 청 황실에 서양화가 파견을 요구했다. 일종의 트레이드 오프였다(말이 되는 거래인가 싶지만 그림과 종교를 하나의 ‘문화’로 퉁 쳤던 게 아닌가 싶다).
누구를 보낼 것인가. 그림을 잘 그리는 카스틸리오네가 당연히 후보에 올랐고, 그는 부름에 화답했다. 다시는 고향땅을 밟을 수 없을지도, 어쩌면 종교 탄압으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젊은이의 패기였을까, 독실한 신앙심이었을까. 카스틸리오네는 1715년, 이탈리아를 출발해 포르투갈과 마카오를 거쳐 베이징까지 이동했다. 그리고 명실공히 청나라 황실에서 총애받는 화가로 일하며 전례 없이 특별한 그림들을 남겼다.
◇정물화, 유럽식 검은 배경 대신 중국식 부드러운 여백 살려
카스틸리오네의 그림은 매력적이다. 묘사력이 빼어나고 색감도 아름답지만, 분위기가 독특해 생경한 끌림을 만들어낸다. 서양식과 중국식을 절묘하게 혼합해 만든 결과다. ‘상서로운 정물화’(1723)처럼. 이 아름다운 꽃 그림을 위해 화가는 비단과 전통안료, 다시 말해 중국의 재료를 택했다. 분명 이탈리아에서는 접해본 적 없던 낯선 재료였을 텐데, 수년 새 중국의 재료를 완벽하게 습득했던 것이다. 기물 역시 중국적인데, 꽃병과 반상은 중국 황실의 소장품에서 선택한 것이다. 의미 또한 옛 중국으로부터 빌려 왔다. 예를 들어 두 개의 귀가 있는 쌀 줄기는 예로부터 현명함을, 한 줄기에서 두 개가 핀 연꽃은 길운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 ‘현명한 황제께서 길운을 갖고 나라를 통치할 것을 확신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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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유럽식 표현도 눈에 띈다. 마치 사진을 찍은 것처럼 사실적인 표현방법은 유럽의 전통으로부터 온 것이다. 일례로 하이라이트와 반사광을 사용해 도자기의 양감을 나타내는 것은 옛 중국에서는 사용하지 않던 방식이다. 동시에 카스틸리오네는 유럽의 전통 정물화를 중국에 맞게 변형시켰다. 본토 유럽의 꽃 정물화는 대개 배경은 시꺼멓고 꽃은 환하다. 꽃에만 조명을 세게 쏴서 빛과 어둠을 강하게 대조시키는 거다. 반면 카스틸리오네는 ‘상서로운 정물화’에서 어둠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중국화의 여백과 부드러운 느낌을 살려 관람자(황제)로 하여금 편안히 볼 수 있게 했다. 아름답고 독특한데, 보기에도 좋으며, 칭송의 의미까지 충만한 작품! 황제라면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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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건륭제가 즉위한 이후에도 카스틸리오네는 충실한 황제의 화가로 일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중 가장 멋진 것은 말 위에 멋진 갑옷을 입고 늠름하게 앉아 있는 건륭제의 초상(‘갑옷을 입고 말을 탄 건륭제’ 1739)이라 할 수 있다. 높이가 무려 3m가 넘는 작품이다.
소재는 별로 특별할 것이 없다. 잘생긴 말 위에 앉은 지도자상이다. 서양미술사에서 조각으로, 회화로 무수히 반복해 제작한 기마상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서도 카스틸리오네는 동서양을 완벽히 조화해 특별한 작품으로 만들었다. 재료는 중국의 것을, 기법은 부드러운 색채와 사실적인 묘사를 하는 유럽식을 사용한 것은 이전과 동일하다. 다만 이 초상화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동서양을 섞었다. 중국의 갑옷을 입은 황제는 다소 평면적으로, 말은 유럽의 어느 화가가 봐도 울고 갈 정도로 입체적으로 그렸다. 배경을 그릴 때도 후경은 중국식 산수로, 전경 아래는 사실적인 서양식 묘사를 한껏 사용해 완성했다.
소재를 선택하고, 구도를 잡고, 묘사를 하는 전 과정에서 카스틸리오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레퍼런스를 총출동시켰을 거다. 로마의 기마상, 유럽에서 봤던 왕의 초상화, 식물화, 동물화, 중국의 산수화, 중국의 황실 초상화 등등. 편집은 창조라더니 동서·신구의 다양한 소스를 혼합시킴으로써 카스틸리오네는 세상에서 가장 독특한 그림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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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들 외치는 ‘동서융합’ 18세기에 이뤄내
왕실화가는 유럽에도 있던 전통이다. 그래서인지 카스틸리오네는 중국 황실화가에게 기대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림을 통해 오직 황제를 섬겨야 한다는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림자를 보라. 말의 얼굴을 그릴 때는 그림자를 사용해 올록볼록한 잔 근육을 표현했다. 반면 황제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없다. 눈꺼풀과 코 옆쪽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완전평면이다. 마음만 먹으면 렘브란트 저리 가라 할 만큼 드라마틱하게 빛을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과감히 그림자를 생략한 거다. 어찌 감히 왕의 얼굴에 어둠을 드리울 수 있겠느냐 하는 뜻이었으리라. 여기에 황제의 얼굴 주위의 갑옷은 혀를 내두를 만큼 세세하게 표현해 권위와 위엄을 강조했다.
끝이 아니다. 그 뒤로 놓인 화살에도 의미가 있다. 만주족은 기수들의 사격 솜씨 덕분에 정권을 손에 넣었던지라 기마부대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카스틸리오네는 황제 뒤편으로 여섯 대의 화살을 크고 자세히 그림으로써 청나라의 기마부대와 이를 관장하는 황제를 확실히 강조했다.
이로써 또 한번, 아름답고 독특하면서 보기에도 좋으며 의미까지 완벽한 작품을 완성했다. 이런 그림을 그렸으니 황제에게 예쁨을 받는 것은 당연지사. 카스틸리오네는 점점 더 고위직으로 올라갔고, 건륭제는 그의 그림 옆에 글을 직접 적기도 했다. 1766년 베이징에서 카스틸리오네가 노환으로 사망했을 때도, 건륭제는 직접 추도문을 쓰고, 특별한 비석까지 세워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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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틸리오네의 본디 목적이던 선교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미술사에 남긴 족적만큼은 뚜렷하다. 수백년이 지나도 여전히 흥미롭고 아름다운 작품을 남긴 것도 놀랍지만, 이후로 동아시아의 미술가들이 주구장창 부르짖는 ‘동서융합’을 무려 18세기에 이처럼 멋지게 해낸 것 또한 대단하다. 각기 다른 요소의 조화로 청나라 황제들을 매료시켰던 그의 그림은 오늘날 베이징과 타이페이의 고궁박물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 동서양을 막론한 세계 유수의 기관에서 자랑스러운 소장품으로 빛나고 있다.
‘혐오의 시대’라고들 한다. 지역·성별·세대·재산·소득·이념, 이 모든 것을 기준 삼아 너와 나를 나누고 서로를 적대시하느라 바쁜 세상. 그 옛날, 달라도 너무 다른 요소들을 멋지게 한 화면으로 담아낸 카스틸리오네의 아름다운 그림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작은 울림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