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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3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며 역대 최악의 방화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 대구 지하철 참사가 발생한지 불과 2년이 지난 시점이라 초동 대처는 빨랐다. 사고 발생 직후 당시 서울도시철도공사 직원이 소화기를 이용해 재빠른 초동 진압에 나섰으며 승객들은 철산역에서 하차해 모두 무사히 대피했다.
이후 광명사거리역 방면으로 긴급히 대피를 하던 열차는 미처 잔불이 정리되지 않아 재발화했다. 화염에 휩싸인 열차는 광명사거리역 대피 선로에서 가까스로 완전히 불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화재가 발생한 전동차의 기관사는 끝까지 남아 광명사거리역 대피 선로까지 열차를 책임지고 운행하는 직업의식을 보여 줬다. 대구 지하철 참사 당시 전동차 기관사가 승객 대피 및 화재 초동 진압 매뉴얼을 무시하고 혼자 마스터키를 갖고 탈출하며 인명 피해를 키운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방화범은 불을 지른 직후 도주했지만 사건 발생 45일 만에 경찰에 검거됐다. 그의 배낭에서는 일회용 라이터 15개가 발견됐다. 해당 불로 열차 8량 중 3량이 전소했다. 3량 중 2량은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타 폐차됐다. 그나마 상태가 양호했던 1량은 도봉차량사업소에서 화재 사고의 경각심을 높일 목적으로 영구 보존 처리됐다. 해당 불로 약 20억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서울 지하철 7호선 신풍~온수 구간 전동차 운행이 3시간 30분 가량 중단됐다.
방화범은 범행 동기에 대해 “주식 투자에 실패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흔적도 없이 죽으려고 방화를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새해 벽두부터 아찔한 대형 인명 사고로 남을 뻔했던 이 사고는 열차 안전성 측면에서 일정 부분 성과를 내기도 했다. 대한민국 전동차 내장재 개조 작업이 이 사건을 기점으로 빠르게 속도를 냈다. 대구 지하철 참사 이듬해인 2004년부터 내장재 교체 작업이 진행됐지만, 속도는 거북이걸음이었다. 2004년 말까지 불연재로 개조된 전동차는 서울 기준 20%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전동차 내장재를 불연재로 신속히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결국 2000년대 후반까지 여유 있게 전동차 내장재의 불연재 교체 작업을 진행하려던 철도 회사들은 애초의 계획을 수정해 2006년까지 모든 전동차 내장재의 불연재 개조를 완료했다.
당시 사건이 발생했던 7호선 일부 역들엔 조형미를 위해 승강장의 외벽을 인공 암반처럼 꾸며 놓기도 했는데 그 재질이 화재에 취약하고 유독 가스를 내뿜는 우레탄이었던 터라, 이 사건 이후 인공 암반은 철거되고 평범한 타일로 대체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