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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새 30만명 미술관으로…'어느 수집가 이건희' 10조 가치 이제부터

오현주 기자I 2022.04.28 00:01:03

이건희 기증 1주년 '어느 수집가의 초대' 전
미술 문외한도 "이건희컬렉션 보자"
코로나에도 1년 전국 30만명 다녀가
'1주년 기념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기증받은 7개 미술관 355점 4개월간
모네 '수련', 정약용 '정효자전' 첫선

‘이건희 기증 1주년 기념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 전에 나온 최종태의 ‘생각하는 여인’(1992·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8일부터 8월 28일까지 4개월간 펼칠, 지난해 4월 소장품을 기증받은 전국 7개 미술관에서 엄선한 355점 중 한 점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이윤정 기자] 어둠 속에 허리를 반쯤 접은 채 웅크리고 앉은 여인은 반가사유상을 닮았다. 한 손은 단발머리 날리는 머리와 맞닿은 턱을 괴고, 한 다리는 길게 늘어뜨린 치마 사이로 다른 다리 위에 겹쳐 올렸다. 군더더기라곤 하나도 없는 깔끔한 자태의 여인.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무슨 생각에 저리 빠져 있을까.

원로조각가 최종태가 빚은 이 ‘생각하는 여인’(1992)이 언제부터 이건희컬렉션에 속했는지는 정확치 않다. 하지만 어떻게 속하게 됐는지는 분명하다. 사찰에는 성모상을 닮은 관음보살을, 성당에는 관음보살을 닮은 성모상을 세웠던 작가의 손끝이 이건희(1942∼2020) 삼성 회장의 마음을 움직였을 거다. 고전과 현대, 동양과 서양을 두루 섭렵한, 치우침 없는 그의 소장품이 또 생전에 남겼다는 그의 말이 직접 내보이고 있지 않은가. “문화는 좋고 나쁨으로 우열을 논할 수 없습니다. 단지 다를 뿐입니다.”

정약용의 ‘정효자전’(1814·국립중앙박물관·위)와 ‘정부인전’(1814·국립중앙박물관). ‘이건희 기증 1주년 기념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 전에 처음 공개한 작품이다. 강진에서 유배 중이던 정약용이 정여주의 요청으로 서른 살 세상을 떠난 그의 아들 정관일의 효행에 관한 글을 짓고 썼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건희 회장 소장품 기증’이란 대형사건이 한국사회에 ‘뚝 떨어진’ 지 1년. 그날 그 일을 대규모 기념전으로 다시 돌아본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어느 수집가의 초대’란 타이틀로 펼치는 전시에는 전국 7개 미술관으로 흩어져 간 소장품 2만 3000여점에서 엄선한 295건 355점을 꺼내놓는다. 한국미술관역사에서 단 한 번도 없었을 ‘연합전’을 이끌어낸 것도 결국 ‘이건희’다.

◇한국미술관역사상 처음 시도한 ‘연합전’…7개 미술관서 355점

“국민 품으로 돌려보낸다.” 지난해 4월 28일, 전국 7개 미술관으로 소장품을 실어보내며 달랑 한마디 붙였던 이 회장의 유지는 그대로 현실이 됐다. ‘돌려보낸다’에 화들짝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나니 사실 더 절절한 건 ‘국민 품’이었다.

‘범종’(10∼11세기·국립중앙박물관). 통일신라시대 범종 형식을 이어받은 고려시대 작품. 범종 뒤러 영상을 입히고 종을 울릴 때 나는 소리를 효과음으로 깔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동자석’(조선시대·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어린아이 형상을 새겨 무덤 주인의 영혼을 위로하고 수호신 기능을 하도록 무덤 앞에 세웠던 돌조각. ‘이건희 기증 1주년 기념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 전에 한꺼번에 외출을 했다. 뒤쪽에 난 창에 얼핏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1917∼1920)이 비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5월 양구 박수근미술관을 시작으로, 6월 대구미술관과 광주시립미술관, 7월 서울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9월 전남도립미술관과 제주 이중섭미술관 등 마치 도미노게임을 하듯 한반도 전체를 휘감은 ‘이건희컬렉션’ 열풍이 그랬다. 짧게는 50일, 길게는 9개월 넘게 이어가고 있는 전시에서 ‘이건희’란 이름 아래 모여든 누적관람객 수는 30만여명(국립현대미술관 13만명, 이중섭미술관 5만 4500명, 대구미술관 4만명, 박수근미술관 2만 4000명, 국립중앙박물관 2만 3000명 등).

중요한 것은 이들 관람객 수가 ‘최대’가 아닌 ‘최소’란 거다. 코로나19 탓에 하루 관람객 수를 극히 제한했으니 말이다. “BTS 콘서트 예약보다 빠르다”며 ‘신의 클릭’이 필요하다는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빨리 공개하라는 민원이 빗발쳐 예정일보다 6개월 앞당겼다”(대구미술관), “관람한 분들보다 되돌아간 분이 더 많았다”(이중섭미술관)는 지역 미술관의 ‘비명’도 연이어 나왔다. 9개월째 ‘이건희컬렉션 특별전’(6월 6일까지) 중인 국립현대미술관은 예약제를 풀어버린 요즘 1시간 가까이 긴 줄을 선 채 기다리는 관람객을 맞느라 더 분주해졌다.

‘달항아리’(18세기·국립중앙박물관·오른쪽부터)와 김환기의 ‘작품’(1950s·광주시립미술관), ‘26-Ⅰ-68’(1968·광주시립미술관). 조선의 달항아리를 즐겨 그렸던 김환기의 회화작품들을 조선시대 달항아리와 배치해 감동적인 볼거리를 만들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아예 서울지도를 바꿔버린 것도 이건희컬렉션의 영향력이다.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에 ‘이건희 기증관’을 세우기로 한 일 말이다. 길게는 110년 짧게는 24년, 일제와 미국이 점령한 ‘남의 땅으로’, 또 이후엔 잡초만 무성히 키웠던 그 터에 미술관을 짓고, 기증받은 이 회장의 소장품을 모으기로 한 거다. 지난해 11월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와 서울시 수장들이 이례적으로 나란히 앉아 ‘업무협약식’을 진행하는 진풍경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처음에는 ‘돈’이었다. 이건희컬렉션이 ‘세기의 기증’으로 공개됐을 당시 ‘감정가 3조원 시가 10조원’이란 얘기에 세상이 들썩였다. 마치 그 액수가 어느 날 내 품에 안기는 횡재를 맞은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더랬다. 맞다. 10조원. 하지만 그 가치가 단순히 소장품 가격만이 아니란 게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한 해 동안 미술관이란 단어가 대중의 일상어였다”(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새로운 기증문화의 패러다임을 만들었다”(황희 문체부 장관) 등이 가져온 또 가져올 가치는 10조원쯤은 우스운 거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1917∼1920·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소장품 기증’ 1주년 만에 처음 공개했다. 이 작품을 앞세워 국립현대미술관은 장욱진의 ‘가족’(1979), 권진규의 ‘문’(1967), 임옥상의 ‘김씨연대기Ⅱ’(1991) 등 총 35점을 내놨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천경자의 ‘만선’(1971·전남도립미술관·왼쪽)과 이중섭의 ‘섶섬이 보이는 풍경’(1951·이중섭미술관). 지난해 4월 소장품을 기증받은 전국 7개 미술관에서 엄선한 작품들 355점 중 한 점씩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1주년 기념전 첫 달치 예매권 이미 매진

28일부터 8월 28일까지 4개월간 펼칠 ‘어느 수집가의 초대’ 전은 단군 이래 최대 관람객을 미술관으로 불러들인, 이건희란 이름의 ‘단일 기획전’을 이어간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지난해 공개한 정선의 ‘인왕제색도’(1751), 김홍도의 ‘추성부도’(1850) 등을 다시 꺼내고 정약용이 쓴 ‘정효자전’ ‘정부인전’(1814)을 처음 공개한다. 박물관이 출품한 308점 중 국보는 13점, 보물이 20점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선 35점을 내놨다. 그중 최초로 건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1917∼1920)이 단연 눈길을 끈다. 지역 미술관 5곳에선 12점을 옮겨왔다. 박수근의 ‘한일’(1950s), 이인성의 ‘노란 옷을 입은 여인상’(1934), 김환기의 ‘작품’(1950s), 이중섭의 ‘현해탄’(1954), 천경자의 ‘만선’(1971) 등이 곳곳에서 빛을 낸다.

1주년을 보낸 이번에도 전시 관람은 그리 수월하지 않을 듯하다. 1개월 단위로 4차례에 걸쳐 진행할 관람 예매(하루 15회차 100명씩) 가운데 첫 달치 4만장(온라인 분)이 전시도 시작하기 전 이미 동났다.

‘이건희 기증 1주년 기념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 전 전경. 개막에 하루 앞선 언론공개회에 참가한 한 관계자가 김환기의 ‘산울림 19-Ⅱ-73 #307’(1973·국립현대미술관)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왼쪽으론 방혜자의 ‘하늘과 땅’(2010)이 걸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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