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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다섯명의 아이들은 1991년 3월 26일 와룡산에 놀러 갔다가 연락이 두절됐다. 아이들을 와룡산에서 봤다는 몇몇 증언이 있어 이들이 산으로 간 것은 확인이 됐다.
피해자 가족들은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자 오후 7시50분 실종 신고를 했고, 새벽까지 경찰과 가족들이 와룡산 일대를 수색했으나 결국 아이들을 찾지 못했다.
사건 초기 경찰이 아이들이 가출했을 가능성이나 앵벌이 조직에 납치됐을 가능성을 고려하면서 본격적인 수사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 큰 패착이 됐다. 사건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5월이 되어서야 전국적으로 인력이 동원돼 수색이 벌어졌고, 특히 대구에서는 군경이 동원돼 와룡산 전체를 뒤지기까지 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사건 수사본부가 해체된 1996년까지 5년 동안 연인원 30만명을 동원했지만 아이들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고, 결국 아이들은 실종 11년이 지난 2002년 9월 시신으로 발견됐다.
와룡산에 도토리를 주우러 갔던 시민이 실종자들 유골을 발견했는데, 경찰은 이때도 허술하게 대응해 곡괭이로 땅을 파헤치는 등 현장을 훼손해 현장 감식을 제대로 받은 시신은 1구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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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시신이 발굴되고 24년 동안 사건 진상에 대한 온갖 추측이 나왔다. 납득하기 힘든 정황들이 너무 많은 사건이었기 때문에 근거없는 소문, 허위 제보도 난무했다.
집중 수색이 이뤄지고도 발견되지 않았던 시신이 11년이 지나서야 느닷없이 발견된 탓에 피해자들이 다른 장소에서 살해된 뒤 나중에 이곳에 암매장됐다는 추측이 있기도 했고, 아무리 어린 학생들이었지만 피해자가 다섯명이나 된 점은 범인이 이들을 어떻게 통제해 모두 살해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도 낳았다.
일부 전문가들은 납치 사건과 같은 몸값 요구도 일체 없었던 점, 범행 방식이 잔혹했던 점 등을 토대로 살인 자체를 목적으로 한 사이코패스의 범행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90년대 초만 해도 이유없이 사람을 해치는 ‘묻지마 살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수사 방향이 제대로 맞춰지지 못했던 점이 사건 해결에 어려움을 줬다는 분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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