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풍·초과승선…안전불감증에 292명 수장, 서해훼리호 침몰[그해 오늘]

김영환 기자I 2022.10.10 00:11:30

1993년 10월10일 292명이나 사망한 서해 훼리호 사건
기준 인원보다 141명이나 초과 승선
초당 10~14m로 부는 북서풍으로 파도 2~3m…무리한 출항
정부의 무능한 대처와 함께 ‘선장생존설’ 보도한 언론의 민낯까지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1993년 10월 10일.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 인근 해상에서 여객선 서해훼리호가 침몰했다. 이 사고로 무려 292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망했다. 훼리호의 승선 가능 승객은 207명이었다.

(사진=연합뉴스)
훼리호는 낚시 명소로 유명했던 위도와 부안군 격포항을 잇는 배였다. 80년대 후반에 들며 위도가 낚시 명소로 소문이 나면서 특히 주말에는 수백명의 사람이 찾는 곳으로 떠올랐다. 훼리호의 정원은 승무원 14명을 포함해 모두 221명이었다.

사고가 났던 날 훼리호에는 정원보다 141명이나 많은 362명이 탑승한 상태였다. 김장철을 맞아 뭍에서 팔기 위한 멸치액젓 9톤도 실려 있었다. 자갈도 7.3톤을 실었는데 쉽게 짐을 내리기 위해 이 화물을 뱃머리에 두는 바람에 배가 중심을 잃은 채 운행됐다.

당일 날씨도 문제였다. 기상청은 ‘파도가 높고 강풍이 불며 돌풍이 예상되므로 항해 선박의 주의를 요한다’고 주의를 줬다. 초당 10~14m로 북서풍이 불면서 파도의 높이가 무려 2~3m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음날이 월요일이어서 출근을 해야했던 승객들이 출항을 요구했다.

무리하게 승선 인원을 늘리고 날씨가 좋지 않았는데 운항 과정에서 승무원들의 부주의도 문제가 됐다. 항해사가 휴가 중이어서 갑판장이 항해사의 업무를 대신했고 안전요원도 고작 2명만이 배치된 상태였다.

훼리호는 출항예정 시간인 9시를 40분 지나고서야 닻을 올렸다. 출항 후 배 왼편으로 파도가 거세게 부딪히자 침로를 무리하게 바꾼 것이 직접적 사고의 원인이 됐다. 높은 파도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뒤뚱거리던 훼리호는 갑작스러운 키 조작으로 인해 한순간에 뒤집어지고 말았다. 출항 30분만이다.

배가 전복된 이후의 구호 조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갑자기 배가 침몰해서 구명 장비를 꺼낼 틈도 없었다. 승객 일부만이 근처의 구명 장비를 긴급하게 꺼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사고 직후 위급 상황을 외부에 알리지도 못했다. 구조 요청이 늦어지면서 인명을 구할 골든타임을 놓친 것이다. 사고지점 부근에 있던 낚싯배와 어선들이 긴급하게 구조에 나섰지만 어려움이 컸다. 해양경찰과 119 구조대 등은 사고가 발생한 지 1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훼리호 사고는 대한민국에 큰 충격을 안겼다. 훼리호 사고 석 달 전인 7월 26일 아시아나항공의 여객기가 목포공항에 착륙하지 못하고 인근 야산에 추락하면서 60여명이 목숨을 잃은 사고가 있었다. 연이은 사고에 국민들은 불안감을 느껴야했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이계익 교통부장관과 노태섭 해운항만청장을 경질하면서 여론 달래기에 나섰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가족에게 협박을 섞어가면서 합의를 종용하는 등 정부는 사태 수습에 있어 불성실한 태도를 보였다.

언론의 민낯도 까발려졌다. 훼리호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 7인은 배를 버리지 않고 선상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나 선장이 배를 몰래 빠져나왔다는 오보가 연일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언론의 무분별한 경쟁이 만든 추악함이었다.

훼리호 사고 이후 21년 뒤 대한민국은 ‘세월호’라는 새로운 비극을 맞이했다. 이 당시 선장이던 이준석 선장은 누구보다 빠르게 배를 빠져나왔다. 최소한의 직업의식마저도 찾아볼 수 없는 비극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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