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월드타워 접수한 셰퍼드 페어리…"눈 크게 뜨고 세상 움직여라"

오현주 기자I 2022.08.02 00:01:01

롯데뮤지엄서 '행동하라!' 전 연 셰펴드 페어리
"가장 영향력 있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앙드레 더 자이언트' 스티커 사건 이후
오바마 초상 바탕 '희망'으로 대중 각인
평화·정의·환경·인권 등 메시지 녹여낸
30년 작품세계 더듬는 470여점 내걸어

작가 셰퍼드 페어리가 롯데뮤지엄 ‘셰퍼드 페어리, 행동하라!’ 전에 건 자신의 작품 ‘열린 마음’(Open Minds·2021) 앞에 섰다. 470여점을 걸고 30년 거리예술의 궤적을 더듬는 서울전을 대표하는 한 점이다. 석유와 가스를 분리해내는 기술인 수압파쇄법의 이중성을 꼬집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시작은 장난에 가까웠다. ‘거인 앙드레에게는 그의 패거리가 있다’란 프랑스의 한 프로레슬러를 향한 팬심에서 비롯한 선언 같은 응원. 1989년 열아홉 살의 그는 스티커에 앙드레 얼굴을 박고 문장을 올리곤 미국 북동부 로드아일랜드 거리 곳곳에 단속반을 피해가며 붙이고 다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팬심은 그를 향하고 있었다. ‘복종하라’(Obey)란 단어를 붙인 ‘오베이 자이언트’(거인에게 복종하라)를 연호하면서. 그러니 헷갈릴 지경이 아닌가. 과연 누가 자이언트인지, 앙드레인지 아니며 바로 저 사람 ‘셰퍼드 페어리’(52)인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그의 이름 앞에는 별 의심 없이 이런 수식이 붙는다. 도대체 무슨 영향이기에. 굳이 꼽아보면 특이할 것도 없다. 하나는 메시지고, 다른 하나는 기법이니까. 누구나 거들 수 있는 평화·반전·정의·환경·인권 등의 주제를 누구나 이해할 만한 이미지로 눈앞에 들이대니까. 그런데 그 강도와 파장이 단순치 않은 거다. 시각을 뒤흔드는 건 물론 가슴에 콕 박히는 듯하니까. 번쩍거리는 광고로 가득 찬 세상에 비록 몇몇 도상과 문구를 박은 납작한 평면 포스터에 불과하지만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행동하라!”는 메시지를 곧 따라나서야 할 듯하니까.

롯데뮤지엄 ‘셰퍼드 페어리, 행동하라!’ 전 전경. 200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 후반까지 페어리 자신이 직면한 사회문제를 주제로 시각화한 포스터 140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실크스크린·콜라주 등의 방식으로 제작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 ‘납작 포스터’의 위력을 확인할 자리가 생겼다. 페어리가 그들을 이끌고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로 진격한 거다. 사실상 국내 최대 규모의 개인전일 롯데뮤지엄에는 늘 그랬던 것처럼 그의 다부진 선언이 먼저 보인다. ‘셰퍼드 페어리, 행동하라!’ 그 테마 아래 ‘눈을 뜨다, 마음을 열다’(Eyes Open, Minds Open)가 부제, 아니 세부강령으로 달렸다. 페어리 작업의 핵심이라 할 평면작품을 앞세우고 영상·사진·벽화 등까지 날아온 작품 수만 470여점. 1990년대 초반 ‘오베이 자이언트’ 캠페인으로 세상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던 때부터 정교하고 세련되게 다듬어져 시각예술로 진화해온 오늘까지, 30년 궤적을 한자리에 집대성했다.

롯데뮤지엄 ‘셰퍼드 페어리, 행동하라!’ 전 전경. ‘지구보존’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한 데 모았다. 지구온난화, 석유산업 등으로 인한 위험에 대한 실질적인 목소리를 담은 ‘환경 시리즈’다. ‘미국이 좋아하는 것’(2013·정면 왼쪽), ‘파라다이스로 돌아가다’(2015·정면 오른쪽), ‘검게 칠해주세요’(2019·맨오른쪽) 등이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오베이 자이언트’로 살아온 거리예술 30년 집대성

1970년 미국 남부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페어리는 어린시절을 “지루했다”고 회상한다.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하던 대학시절, 스케이트보드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스티커를 만들어 보드에 붙이는 일이 유일한 낙이었다는데. 그때 그 ‘스티커 사건’이 터진 거다. 그 ‘작품’이 순식간에 동부 전역으로 퍼지면서 말이다. 프로레슬링 분야의 역사가 된 앙드레 르네 루시모프(1946∼1993). 그가 본명 대신 ‘앙드레 더 자이언트’란 별칭으로 불린 건 223㎝, 227㎏의 거구 때문. 한 시대를 풍미했다지만 오래전 한물간 그가 어느 날 다시 회자된, 참으로 엉뚱한 계기였다.

작가 셰퍼드 페어리가 롯데뮤지엄 ‘셰퍼드 페어리, 행동하라!’ 전에 건 자신의 작품 ‘오베이 3’(연작·2022), ‘여기 당신의 광고’(2022)를 둘러보고 있다. ‘오베이 자이언트’의 첫발이 된 ‘앙드레 더 자이언트’의 얼굴을 끊임없이 변주해오던 중 발표한 신작들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저 어느 대학생의 치기로 여겼던 그 사건 이후 ‘셰퍼드 페어리’란 이름을 확실하게 띄운 건 2008년이었다. 미국 대선 당시 후보였던 버락 오바마의 초상화를 바탕으로 ‘희망’(2008)을 제작한 일인데. 오바마를 지지하는 아티스트로서 만든 작품은 이내 캠프의 공식포스터로 채택됐고, 페어리와 오바마 둘 다를 대중에 각인했다. 이후 반전·평화·환경 등 민감한 문제를 단출하면서도 강렬하게 옮겨낸 그의 작업이 힘과 날개를 단 건 물론이고.

그 ‘오바마 희망’(2008)이 서울로 날아와 ‘바스키아’(2010), ‘워홀’(2010), ‘마틴 루터 킹 주니어’(2007) 등과 나란히 걸렸다. 사실 페어리의 작품에서 유명인을 만나는 일은 드물지 않다. 세계사에서 긍정적 변화를 이끈 인물을 의식적으로 등장시켜 지금 인류가 맞닥뜨린 문제를 좀더 극적으로 전달하려는 영리한 방식 덕이다. ‘오베이 자이언트’의 첫발이 된 ‘앙드레 더 자이언트’의 얼굴 또한 초기작(‘앙드레 헨드릭스 프린트’ 1993 등)부터 변주(‘반복작업’ 2011 등)를 거쳐 최근작(연작 ‘오베이 3’ 2022 등)까지 수시로 접할 수 있다.

롯데뮤지엄 ‘셰퍼드 페어리, 행동하라!’ 전 전경. 셰퍼드 페어리란 이름을 대중에 각인시킨 ‘오바마 호프’(2008)가 중앙에 걸려 있다. 왼쪽으로 ‘처크 D: 권력과 싸우다’(2020), 오른쪽으로 ‘바스키아’(2010)가 걸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원색의 색감, 명료한 구성을 특징으로 하는 페어리 작업의 핵심은 ‘반복’이다. 정치·문화·사회이슈에서 빼낸 이미지를 되풀이하고 비틀어대는 ‘실험’을 거듭하는데. 이때 즐겨 참여하는 ‘도우미’가 있으니 꽃(주로 장미), 별, 비둘기, 지구, 천사 등. 때론 주연, 때론 조연인 이들의 도상을 설명하며 페어리는 “역경을 이겨내는 좋은 의미의 상징”이라고 했다.

이번 서울전을 대표하는 ‘눈을 뜨다’(2021) 역시 그중 하나다. 장미와 카네이션을 결합한 가상의 꽃을 큰눈이 달린 지구본 위에 피워낸 작품은 페어리의 삶과 작품세계 30년을 집약한다. “눈을 크게 뜨고 우리 사는 환경과 세상을 살피라는 뜻”이란다. 꽃을 머리에 꽂은 매력적인 여인을 등장시킨 또 하나의 열쇠작인 ‘열린 마음’(2021)은 좀더 구체화한 현실에 접근한다. 석유와 가스를 분리해내는 기술인 수압파쇄법의 이중성을 꼬집었다니까. “미국을 가스·석유 최대생산국으로 만들어준 이 기술이 지구환경에 여러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고.

작가 셰퍼드 페어리가 롯데뮤지엄 ‘셰퍼드 페어리, 행동하라!’ 전에 건 자신의 작품 ‘눈을 뜨다’(Eyes Open·2021·오른쪽)와 ‘열린 마음’(Open Minds·2021) 사이에 섰다. 470여점을 걸고 30년 거리예술의 궤적을 더듬는 서울전을 대표하는 두 점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석촌호수·도산대로…전시장 밖에 걸린 대형벽화

“끊임없는 소통이 내 발전의 원동력”이란 페어리의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다. 그가 해온 대단한 일 중 하나는 거리에 벽화를 내걸고 ‘세상과의 소통거리’를 계속 던져댄 데 있으니까. “예술은 대중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란다. “벽화의 규모는 자연스럽게 화제가 되고, 그 벽화를 통해 도시가 개인의 표현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는 생각에서다.

전시장 밖으로 나온 셰퍼드 페어리의 대형벽화 ‘눈을 뜨다’(2022).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몰 입구에 걸렸다. ‘셰퍼드 페어리, 행동하라!’ 전에 맞춰 페어리는 서울 시내 다섯 곳을 선별해 ‘대형벽화’를 설치하고 시민과의 소통을 시도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번 서울전에도 예외없이 따라왔다. 서울 시내 다섯 곳을 선별해 ‘대형벽화’를 설치한 건데. 3명의 팀원과 함께 제작했다는 벽화는 석촌호수 문화실험공간 호수의 외벽(‘평화의 비둘기’ 2022), 도산대로의 한 건물 외벽(‘장미의 족쇄 위로 올라’ 2022), 성수동 피치스도원 외벽(‘오베이 자이언트’ 2022)과, 롯데월드타워의 1층 로비(‘정의를 재배하다’ & ‘글로벌 하모니’ 2022), 롯데월드몰 입구의 외벽(‘눈을 뜨다’ 2022) 등에 걸려 시민과의 소통을 시도한다.

전시장 밖으로 나온 셰퍼드 페어리의 대형벽화 ‘정의를 재배하다’(2022).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1층 로비에 세웠다. ‘셰퍼드 페어리, 행동하라!’ 전에 맞춰 페어리는 서울 시내 다섯 곳을 선별해 ‘대형벽화’를 설치하고 시민과의 소통을 시도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전시장 안팎의 페어리 작품을 꿰뚫는 철학은 의외로 간단하다. ‘모든 것에 의문을 던져라’다. “다른 말로 풀면 ‘눈을 뜨고 마음을 열라’가 된다. 이를 토대로 작품마다 내거는 원칙이 있는데 ‘내가 대우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해야 한다’는 심플한 생각이다.” 하지만 그 ‘심플한 생각’이 결국 복잡한 세상을 움직였다. 인종과 성평등 문제를 풀고, 지구를 존중하고, 이민·종교를 불문한 인간의 기본 존엄성을 회복하고.

그렇다면 과연, 세계가 러브콜을 보내는 이 ‘거리예술의 거장’에게도 버거운 문제란 게 있을까. 아티스트로서 어려움이 뭔가를 묻자 대뜸 나온 대답이 “생계를 유지하는 일”이다. “창작자의 감성이 척박한 문화를 만났을 때” “아이디어를 나누자 했는데 가혹한 비판이 돌아올 때” 등 진짜 힘들어 보이는 난제조차 어쩔 수 없이 ‘생계’ 뒤로 밀렸다. 전시는 11월 6일까지.

작가 셰퍼드 페어리가 롯데뮤지엄 ‘셰퍼드 페어리, 행동하라!’ 전에 들어서는 초입에 섰다. 뒤쪽으로 ‘오베이 자이언트’의 첫발이 된 ‘앙드레 더 자이언트’의 얼굴을 단순화한 도상이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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