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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 정부는 1958년 이미 정적이었던 진보당 조봉암을 사법살인하고 같은해 4대 총선에서도 부정선거를 저지르는 등 장기 집권 야욕으로 완전히 부패한 상태였다.
그러나 부정선거를 시도했음에도 4대 총선에서 민주당에 개헌저지선을 내주는 등 기대 이하 결과에 실망한 상태가 지속되자 4대 대선까지도 부정선거를 시도하게 된다.
부정선거는 내무장관 최인규 주도 하에 실행되었는데, 최인규의 후일 재판 판결문 기록을 보면 그가 “어떠한 비합법적인 비상수단을 사용하여서라도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선생이 꼭 당선되도록 하라. 법은 나중이니 우선 당선시켜 놓고 보아야 한다”며 부정선거를 독려하고 기획했음이 드러난다.
3.15 선거 자체도 이러한 시도의 결과인데 당초 5월 대선이 예정돼 있었으나 여당에 유리하도록 두달이나 선거를 앞당긴 것이다. 다만 당시 야당 유력 후보였던 민주당 조병옥이 갑작스레 병사하는 바람에 실제 부정선거 준비는 부통령 선거에 집중됐다.
특히 이승만이 당시 85세 고령이었기 때문에 부통령 선거가 더 중요한 사정도 있었다. 당시에는 대통령 유고시 대행 체제가 아니라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시스템이어서 인기없는 이기붕이 낙선하면 대통령 사망 시 민주당이 대통령직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부정선거 방식은 갖가지 방법이 총동원됐다. 투표함의 40% 정도를 이승만, 이기붕으로 기표된 표로 미래 채워놓고 시작하는 것부터, 투표함 바꿔치기, 동행 투표를 통한 자유당 투표 유도 등이 자행됐고 정치깡패들을 동원해 참관인을 겁박하고 쫒아내는 일도 있었다.
개표 과정에서도 투표함을 몰래 바꾼다던가 고의적인 무효표 만들기 등의 방법이 쓰였다.
노골적인 부정 선거에 전국 각지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마산에서는 대선 당일부터 한달 가까이 격렬한 시위가 이루어지면서 경찰 발포까지 이루어졌는데, 오늘날 우리가 3.15 마산 의거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는 이 사건으로 9명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을 본 마산에서 2차 의거가 발생했고, 하루 동안 전국에서 100명 넘게 사망한 4.19 의거로까지 이어진다.
이승만은 결국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하고 한달 뒤 하와이로 망명한다. 장기집권을 원했던 그들은 결국 최악의 방식으로 다음 세대 정치 체제의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