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원 전 기업은행장은 27일 이데일리와 인터뷰에서 “은행이 ‘업의 본질’에 충실히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국내 은행들이 이자 이익에 의존하고, 핵심 성과 지표(KPI)까지 수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설계할 정도로 업의 본질에서 멀어져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기획재정부 경제정책국장, 국제통화기금(IMF) 상임이사, 대통령 비서실 경제수석 등 36년을 공직에 몸담았다가 국책은행장으로 현장을 경험한 그는 최근 저서 ‘대한민국 금융의 길을 묻다’를 펴냈다.
윤 전 행장은 “은행의 본질은 단순히 돈이 남는 곳과 부족한 곳을 연결하는 자금 중개 기능을 넘어선다”며 “위험을 소화(중개)하는 과정에서 자금 배분의 효율성이 높아지고, 은행 수익이 올라가며 국가 경제에도 기여하는 게 업의 본질이다”고 했다. 자금이 단순히 안전한 곳이 아니라 감당 가능한 리스크 아래 성장 가능성이 큰 곳으로 흐르게 되면 국가 경제 전반의 생산성, 역동성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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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은행 대출 구조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보나.
△국내 기업대출의 약 80%가 담보·보증 기반이다. 신용대출은 20%도 안 된다. 이 구조에선 은행의 여신 심사 역량도 발전하기 어렵다. 담보가 있는 기업은 신용이 같더라도 금리를 낮출 수 있으니 담보를 활용하는 건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대출을 결정하는 구조는 문제다. 사업성이나 성장 가능성을 반영한 여신은 위축된다. 결국 성장성 있는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지 못하면 은행도 동반 성장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장기적으로 은행에도, 경제에도 손해다.
-어떻게 바꿔야 하나.
△과거의 눈으로 미래를 볼 수 없다. 담보나 보증은 과거의 지표다. 하지만 은행은 미래를 보고 금융(자금 배분)을 해야 한다. 행장 시절 기업은행의 대출 포트폴리오도 여전히 전통 산업 중심이었고, 미래 신산업을 향한 시선이 처음엔 부족했다. 포트폴리오가 10년, 20년 뒤에도 지속 가능한 구조가 되려면 지금부터라도 미래 유망 산업 중심으로 구성해야 한다. 그게 은행의 미래를 위한 활동이다.
-미래 산업 대상 대출은 리스크가 있어 현실적 고민도 클 텐데.
△지금은 다행히 데이터와 통계 기반의 정보 분석 모델들이 많이 발전해 있는 상태다. 하지만 여전히 ‘정보의 비대칭’ 문제는 존재한다. 기업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기업 자신이지만, 은행은 산업 전반, 경제 흐름, 협력업체 같은 넓은 범위의 데이터를 갖고 있어 기업이 모르는 정보를 쥐고 있기도 하다. 결국 이 둘 사이의 비대칭을 줄이는 게 핵심이다.
-그래서 ‘금융주치의 프로그램’을 도입한 건가.
△맞다. 은행장 시절 도입한 금융주치의 프로그램은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제도였다.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를 진단한 뒤 맞춤 처방을 내리는 것처럼, 은행이 보유한 다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기업에 종합적인 금융·비금융 진단을 제공한다. 단순히 신용도나 대출 규모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기업의 전·후방 협력업체 상황, 산업 구조, 재무 흐름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그러고 나서 대출 구조를 어떻게 개선하면 좋은지, 사업 운영 측면에서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처방’하는 거다. 이 과정에서 정보의 비대칭을 해소하고, 기업은 더 튼튼해질 수 있다. 결국 그 혜택은 은행에도 돌아온다.
-은행들은 모험자본 투자 여력이 없다고 하는데.
△모험 자본은 일반 대출처럼 대부분이 회수되는 구조가 아니다. 성공 확률이 낮더라도, 일부 성공 기업이 전체 수익을 견인할 수 있다. 그래서 ‘풀링(pooling)’ 구조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은행이 2조 5000억원의 이익을 냈다면 그 중 5~10%를 시드 머니로 활용해 모험자본에 투자한다면 일부 손실이 있어도 전체적으로는 수익을 낼 수 있다. 또 스타트업은 미래지향적 대출 구조와 가장 잘 맞는 대상이다. 스타트업과 관계를 구축해 투자와 대출을 병행하면 결국 은행의 고객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
△가계, 기업대출이 늘면 금융 소비자로서는 분명히 편리하다. 하지만 신용이 과도하게 팽창하면 경제 전반의 금융 리스크가 커진다. 특히 민간 신용이 늘어나는 것이 과연 경제 성장과 혁신에 도움이 되느냐는 것이다. 민간 신용이 GDP의 150%를 넘어서면 신용 확대가 성장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이 시점부터는 자본시장 중심의 금융 구조가 오히려 성장 친화적이라는 분석도 있다. 금리 인상만으론 가계·기업 부채 증가를 억제하기 어렵고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등 거시건전성 규제가 필요하다. 중요한 건 규제 방식이다. 금융기관을 하나하나 옥죄기보다 보다 투명하고 시장 친화적인 제도를 설계해 금융기관들이 그 틀 안에서 자율적으로 움직이며 따라오게 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최근 은행이 디지털 조직을 키우고, 인공지능(AI)을 여신 심사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한다.
△여신 심사는 사람이 판단하지만 그 판단을 은행 시스템이 백업해줄 수 있어야 한다. 판사가 누구냐에 따라 판결이 달라지면 안 되듯, 은행도 심사역 간 판단 편차를 최소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조직 내부에 축적된 ‘조직적 판단 기준(Institutional memory)’이 필요하다. 어떤 심사역이 보더라도 큰 편차 없이 일관된 기준과 데이터를 갖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금융 산업이 어떤 점을 더 보완해야 하나.
△우리 금융산업은 1990년대 금융 자유화 이후 지난 30년 동안 꾸준히 발전해왔다. 이제는 역동성, 포용성 같은 질적 요소까지 채워나가야 하는 것이 과제다.
-트럼프 관세 정책 등으로 시장 변동성이 큰데.
△환율, 금리 같은 시장 변수는 단기적으로는 출렁이지만, 결국 펀더멘털에 따라 방향이 결정된다. 일희일비하기보다 큰 흐름과 구조를 보면서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