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더 뼈아픈 건 정책이 실종됐다는 것이다. 정책은 한가지 법안과 예산안이 시작되거나 바뀌면 앞으로 국민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책이란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생각하는 행위인데 과거 벌어진 일에 대해 진영논리에 따라 극렬하게 다투느라 미래 생각으로 대표되는 정책은 뒷전이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정치는 국가의 미래를 책임지는 것이다. 과거에 관한 판단은 사법부와 역사에 맡기고 국회가 중심이 되는 정치는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위한 정책을 법으로 만들고 이 법들이 잘 시행되도록 정부를 돕고 견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책무다. 정책이 중심이 되는 정치가 바른 미래를 가져온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정치는 철저히 과거에 매몰돼 있다. 정치인들이 민생과 서민 운운하며 가끔 보여주는 행태들은 연기력이 아무리 뛰어나고 팬덤의 지지가 든든해도 결코 국민의 미래를 책임지지 못하고 오히려 망가뜨린다. 정치인이라는 직업은 미래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맡아야 하고 그렇게 행동하도록 길러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 정치인은 그렇지 못하고 과거지향적인 훈련이 된 사람이 맡아서 과거 몰이하면서 경력을 쌓아가고 있다.
정치인이 되는 직업군 중 법조인이 많다는 점에서 그런 지적을 받고 있기도 하다. 법조인이라는 직업은 기본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일을 판단하는 능력과 활동이 가장 중요시된다. 국회의원의 가장 중요한 책무인 법안을 만들고 예산을 심의하는 행위 모두가 이를 통해 미래에 어떠한 결과가 발생할 것인지를 철저하게 분석하는 것을 토대로 이뤄져야 한다. 그래서 법조인들은 정치인이 되기 전이나 되고 난 뒤 반드시 이렇게 미래에 대한 사전 분석 훈련과 적응 노력이 필요하다.
필자는 평생을 학자로 살아오면서 정책의 변화가 미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연구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한때 검찰 조사와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과거 발생했던 상황을 기억해내고 이에 관한 판단을 받는 과정에서 큰 고통을 받았다. 이 고통은 당시 어려웠던 상황으로 오는 것도 있었지만 더욱 큰 고통은 과거에 매몰된 채 무한 반복되는 과거에 대한 되새김질로 미래에 관한 생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지금은 개인이 아닌 국민 전체가 이처럼 과거에 갇힌 채 미래 생각 자체가 소멸하는 집단적 고통을 모두 함께 겪고 있다.
정치와 정책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가 중심이 돼야 한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미래 이야기나 정책 이야기는 독자의 관심이 낮다는 이유로 무시되기 쉽다. 레거시 언론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체와 유튜버 등 메신저를 통해 이러한 상황은 더욱 심화하고 있다. 이러한 언론 생태계는 다시 정치가 과거에 집착하도록 유도하게 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어 내고 있기도 하다. 결국 우리 정치와 언론은 국민을 과거에 가두어 놓고 미래 생각을 못 하게 하는 두 축이 되고 있다. 이제는 우리 정치와 언론을 미래지향으로 바꿔야 한다.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하듯 지금 이 암울한 시기가 어쩌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 지식인의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식인은 자신의 전문지식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훈련과 노력을 통해 언론과 정치가 조금씩 관심을 갖게 해서 국민에게 전달하도록 해야 한다. 지식인의 역할은 실종된 개혁 과제들을 되살리면서 시작해야 한다. 연금개혁, 노동개혁, 교육개혁, 규제개혁, 의료개혁 등과 같은 개혁 과제들이 지금처럼 국민적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면 크나큰 피해와 역사적 죄악이 된다는 점을 쉽게 그리고 섬뜩하게 알려 언론이 쓰게 하고 정치인이 귀담아듣도록 해야 한다.
조금 내고 많이 받게 된 연금제도를 하루라도 더 방치하면 미래에 특히 우리 20대와 30대에 얼마나 큰 피해가 돌아가는지 보여줘야 한다. 그동안 정치인들이 왜 이 심각한 사실을 제대로 인식 못 하고 혹은 모르는 체했는지도 알려야 한다. 지금은 우리 정치가 탄핵의 늪에 빠져 있지만 여기서 헤어 나오는 어느 시점에는 그동안 방치한 연금개혁에 의한 피해 대상이, 그리고 피해 정도가 얼마나 더 커질 것인지를 알기 쉽게 전달해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단순히 조금 더 내고, 덜 받고, 또 늦게 받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연금제도 구조 자체를 바꿀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제대로 알려야 한다.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는 걸 골자로 하는 노동개혁 또한 왜 빨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도 알려야 한다. 지금처럼 해고를 어렵게 해서 기업이 정규직 채용 부담이 커지면서 비정규직 채용으로 눈을 돌렸다는 사실과 그런데도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면서 자신들 조합원의 이익을 극대화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전달해야 한다. 그래서 기업은 해고가 자유로워져 정규직 채용을 늘리고 정부는 실업대책과 노동자 능력개발에 집중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한 법적·제도적 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개혁의 구체적 대안과 계획을 국민이 이해하고 공감하도록 해야 한다. 기업과 소상공인들을 옥죄는 규제를 제대로 발굴하고 이를 바로잡는 체계를 구축하는 규제개혁 또한 방치한다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알려야 한다. 나아가 마구 늘려놓고 수습도 못 하는 저출산 대책도 구조조정을 해서 새롭게 재정비하고 추진하는 것도 이 순간 언론에서 그리고 정치에서 논의돼야 한다. 인구전략기획부를 출범시키는 법안을 속히 통과시켜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교육열과 교육 수준임에도 대입에만 매몰돼 있는 우리 교육을 바로잡는 교육개혁도 방치해선 안 된다. 대한민국의 미래 경쟁력을 결정짓는 교육의 기능이 망가지는 과정을 계속 지켜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과거에 매몰돼 분노와 실망과 불안에 싸여 있는 국민에게 잊힌 개혁 과제들을 상기시키면서 미래를 생각하도록 하는 운동이 필요한 때다.